성경연구

로이드존스의 율법에 관한 설교

'코이네' 2024. 2. 28. 21:14

율법에 관한 설교(1816)

The Sermon on the Law(1816)

 

조동호 목사 옮김

 

해설

 

유명한 설교는 1816 9 1 캠벨이 27 때에 베다니에서 멀지 아니한 크로스 크릭(Cross Creek)에서 모인 레드스톤 침례교회 협의회(Redstone Baptist Association) 때에 행한 것이었다. 후에 캠벨은 자신을 "현재의 회복운동"(the present reformation) 뛰어들도록 힘을 실어준 것은 설교에 관해서 일어난 논쟁이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실린 그의 설교는 크게 요약되기는 했으나 설교자의 핵심요점들을 제시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캠벨은 후에 설교를 팜플렛으로 출판하였고, 1846 9월판 밀렌니얼 하빈저<The Millennial Harbinger, Series , Vol. , September, 1846, 493 이하>에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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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관한 설교

 

본문: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3).

 

어휘들은 개념들과 사상들의 표식들입니다. 어휘들이 이해되지 않으면, 개념들이나 감정들은 전달될 수도 없고 받아들여질 수도 없습니다. 자체만으로도 이해가 쉽게 되는 어휘들은 다른 연관된 상황들에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어휘들 가운데 하나는 쉽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휘의 다양한 사용들과 형용어구들의 결과에서는 어휘에 따라붙는 개념들이 무엇인가를 자세하게 확인하는 것이 때로는 어렵습니다.

 

율법이란 말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세밀하게 조사하고, 성경말씀의 일반적인 지식을 적용하면, 이런 종류의 모든 어려움은 쉽게 극복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 구절에 들어있는 가르침을 밝혀내고 시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방법을 면밀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1. 우리는 본문의 말씀과 이와 비슷한 다른 성경말씀에서 우리가 율법(the law)이란 말에 어떤 개념들을 첨부하고 싶어하는가를 확인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2. 율법(the law) 성취할 없었던 것들을 지적해내야 합니다.

3. 율법(the law) 목적들을 이룰 없었던 이유를 증명해야 합니다.

4. 하나님께서 율법(the law) 상관적 결점들을 어떻게 제거하셨는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 이러한 전제들에서 분명하고 절실하게 전적으로 공평하게 심사숙고하면서 그와 같은 결론들을 끌어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에 포함된 교리를 의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첫째로, 본문의 말씀과 이와 비슷한 다른 성경말씀에서 우리가 율법(the law)이란 말에 어떤 개념들을 첨부하고 싶어하는가를 확인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율법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행위의 "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의 때까지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주어진 전체 계시를 랍비들 혹은 율법사들의 전통들과 계명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정관사를 붙이면 의미를 바꾸거나 혹은 적어도 의미를 결정짓습니다. 모세가 살아있는 동안에 율법(the law)이란 말들은 어느 정도 설명 없이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모세의 저술들을 "율법서"라고 불렀으나, 율법이란 말이 갖는 본래의 뜻으로 단어를 결코 쓰지 않습니다. 아비야의 통치 (역대기하 14:4) 이르러서 비로소 율법이란 말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정하신 모든 (the whole legal dispensation)이란 뜻으로 사용되어집니다. 때까지는 율법이란 말이 어느 정도 한정된 정의 없이 사용되고 있었고, 반대의 경우를 입증할만한 설명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한정된 정의 없이 구약성경에서 30 가량 사용되었고, 모세가 전한 모든 율법을 지시하는 형용어구들에 있어서 조차 종종 사용되어집니다.

 

하늘 통치의 교리들이 전파되고 신약성경에서 모세가 제정한 법과 비교되기 시작할 때에 율법(the law)이란 말은 매우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어떤 구별된 형용어구나 한정된 정의 없이 사용될 때에는 말이 언제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제정한 율법(Mosaic dispensation)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보통의 의미에서 그것은 신약성경에서 대략 150 정도 나타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제정한 모든 법을 말합니다. 오늘날 모세의 법은 도덕법, 의식법, 그리고 재판법으로 크게 가지로 나뉘어지거나 구분됩니다. 율법을 이렇게 나누는 일은 사도시대에는 없었던 일이고, 물론 사도들에 의해서 결코 사용되지도 않았던 일이기 때문에 율법에 관하여 사도들이 전한 정확한 교리지식을 얻는데 전혀 무가치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을 당황하게 하고, 많은 사람에게 무익한 논쟁에 휘말리게 것은 율법을 쇄신해 보려한 오늘날의 교사들이기 때문입니다. . . .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몇몇 십계명의 교훈들이 천명되었던 것을 인정하는 것이 진술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부분의 주제를 마무리 짓기 전에 우리는 가지 원리들 모세의 율법에 관한 우리의 관찰 속에 결코 포함시키지 아니한 계명들(commandments) 법들(laws)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것이며, 이것들은 모세의 율법이라 부르는 성경 속에도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 .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계명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대한 예언자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기초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 속에서 교훈들은 모든 법과 예언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된다는 점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모세의 율법에 관해서 말할 때에 우리는 이들 예수의 계명들을 포함시키지 않는 반면, 때때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제정하신 (the legal dispensation) 수정된 모든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the law) 성취할 없었던 것들을 지적해내려고 합니다.

 

첫째로, 율법은 의와 생명을 없습니다. 의와 영생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전자가 없으면, 후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수단으로든 우리가 하나를 소유하게 되면, 다른 것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율법은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3:21).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21).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밝힌 사도의 증거들은 어떠한 사람도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것과 의와 영생은 율법을 통해서 얻어질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둘째로, 율법은 죄의 악성과 결점을 들춰낼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은 그것 아래 있는 것들 어떤 행위들은 죄가 많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많은 행위들에 율법은 해설적인 이름을 붙었는데, 첫째는 도둑질이라 불렀고, 둘째는 살인이라고 불렀고, 셋째는 간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율법은 행위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해롭고, 죽음에 해당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악성이 얼마나 넓고, 그것들의 결점이 얼마나 큰지를 율법은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일은 후대를 위해 남겨졌고, 다른 수단이 개발되었습니다.

 

셋째로, 율법은 불완전한 상태 때문에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적절한 법칙일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은 모든 인류에 해당되는 법칙일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이 단지 일부분에게 주어졌고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유대나라에 주어졌고, 다른 아무 나라에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이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그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한다는 것을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유대인에게조차도 율법은 생명을 주는 가장 적절한 법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생명의 법칙으로서 모범적 행동이 훈계보다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이 우주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전한 모든 율법은 완전한 모델이나 모범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아래서 가장 모범적인 특성들은 그것들의 뚜렷한 불완전성이었습니다.

 

일부다처, 이혼, 노예, 보복 등이 율법아래서 눈감아지는 만큼 오랫동안 율법에 가장 따르는 자들의 삶이 빤한 불완전성들로 얼룩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두에 제안한 번째 주제로 바삐 옮기려 합니다. 그것은 율법(the law) 이들 목적들을 이룰 없었던 이유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사도는 율법이 이들 목적들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인간의 약함 때문이었다고 간략하게 알려줍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였다." 율법의 결함들은 하나의 상관적 종류(a relative kind) 대한 것입니다. . . . 율법은 자체로 약하거나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분적으로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였습니다. 다른 부분들에서는 기초적이고 그림자적인 다가올 선한 것들의 상징들이었습니다. 만일 율법이 결점을 갖지 않았다면, 복음이 설자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서두에서 제안한 번째 주제에 도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율법(the law) 상관적 결점들(relative defects) 어떻게 제거하셨는가 방법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자기 자신의 아들을 많은 육체의 형상으로 보내심으로 모든 결점들을 제거하시고, 죄를 위해서, 육체 가운데서 죄를 저주하십니다.

 

예수는 율법을 크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이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모든 신령한 씨가 의와 영생을 발견합니다. 전체로든 부분적으로든 율법의 행위나 지킴에 의하지 않고, 예수로 말미암은 풍성한 은혜와 의의 선물로 됩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제 남은 것은 . . . 생명을 주기에 적절치 아니한 율법의 실패가 어떻게 구제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모범이 훈계보다 능력 있는 교사란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이전까지 결코 목격되지 않았던 완전한 인간의 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는 모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훈계에 그것들이 전에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살아있는 형태를 제공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모든 솔직하고 반성하는 마음에 그들 자신들을 분명하고 절실하게 제시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결론들을 위의 전제들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 남아있습니다.

 

첫째. 이제까지의 내용으로 봐서 율법과 복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essential difference) 있다는 것이 뒤따릅니다.

율법과 복음보다 서로의 의미에 있어서 별개인 단어들은 없습니다. 그것들은 신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이름 하에 서로 상반되게 구별됩니다.

 

둘째. 우리는 이제까지의 내용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것을 배웁니다. 사도께서 결론을 이끌어낸 전제들은 설교에서 여러분에게 진술한 것들과 같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사도는 말합니다. 로마서 6장과 7장에서 사도는 그들이 " 아래 있지 아니하고," "법에서 해방되었고," "법에 대하여 죽었고," "법에서 구원받았다" 가르쳤습니다.

 

셋째. 우리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드릴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설교해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앞서 언급한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내립니다.

 

결론은 우리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위임과 위임에 따라서 그들이 실천한 것과 완전하게 일치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설교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구약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목회자들로 세워졌습니다.

. . . 초대교회의 모든 설교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설교준비나 혹은 복음을 영접케 목적으로 율법을 설교한 예를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넷째. 앞서 언급한 전제들로부터 연역해낼 있는 번째 결론은, 율법이나 구약성경에서 나온 모든 논쟁들이나 동기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의 유아들에게 침례를 베풀도록 권하기 위해서; 그들의 교사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도록 하기 위해서; 주의 만찬을 지키기 위한 준비로써 거룩한 날들이나 종교적인 금식들을 지키기 위해서; 일째 날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국가계약들에로 들어가기 위해서; 민법으로 어떤 종교형태를 세우기 위해서--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유대관습들을 따르거나 모방하는 것에 신명나도록 유대법에서 빌려온 모든 이유들과 동기들이 기독교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독교에 반대되며, 근본에 무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결합되고 인정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제까지 들은 것들에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최고로 경배하며, 그분을 위대한 예언자로 받아드리며, 율법에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이 그분에 대해서 기록했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분을 우리들의 의의 주님으로 받아드리고, 그분의 모든 훈계들과 그분이 제정하신 것들에 가장 성실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죄를 떠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합시다. 그분에 합당하게 걷도록 합시다.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서 우리가 죄의 사역자로 그리스도를 대표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육체를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적대자에게 책망할 있는 기회를 줘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만약 누가 여전히 반율법주의의 흔해 빠진 권고를 해야 한다면, 혹은 은혜가 풍성키 위해서 우리가 죄에 살았다는 것을 주장한다면, 선한 것이 찾아오도록 악을 행했다면, 혹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익하게 했다면, 책망 받을 것이 없는 행동으로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를 존중함으로써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지를 침묵하게 합시다. . . .

 

다윗의 열쇠를 갖고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아무도 없는 그가 진리를 사랑하며 진리를 받아드릴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속에서 걷도록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길거리에는 그것으로 인하여 기쁨이 있고, 모든 길들에는 그것으로 인하여 평화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아멘.

 

(참고서적: McAllister, Lester G. Ed. An Alexander Campbell Reader. St. Louis, Missouri: CBP Press,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