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의 감사
요 20:11-18
오늘은 년년이 맞이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소중한 시간인지 모르겠습니다. “감사는 감사를 낳고 불만은 불만을 낳는다.” 라는 말을 여러분은 이미 경험하셨을 줄 압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범사에 감사 할 일만 생기고 불평하는 자에게는 범사에 불평 할 일만 생깁니다. 사는 촛점을 감사에 맞추면 하루하루가 기쁘고 즐겁워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사는 촛점을 불평에 맞추면 하루하루가 지겹고 짜증나서 지옥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나라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이땅은 하늘나라가 아니지만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리고 그렇게 사는 방법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 뿐이기에 사도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교훈한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여기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보여진 그녀의 감사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한복음을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요1:12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요한복음안에는 제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는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도 제가 단골로 은혜받는 부분중 하나입니다. 이번주에도 감사절 설교를 찾다가 이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물론 부활절에 적합한 말씀이지만 마리아의 감사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오늘 그것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마리아의 감사” 한마디로 말해서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간 것은 산 예수를 찾으러 간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를 찾으러 간것입니다. 이 때는 예수님의 내노라하는 제자들까지도 다 도망해서 갈릴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거기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무덤속에 뉘일 때”
12제자들은 입이 있건만 유구무언일 겁니다. 허나 막달라 마리아는 “그 때 나 거기 있었노라”고 간증할 수 있읍니다. 그러고 보면 변하는 것이 인간인가 봅니다. 베드로는 죽기를 각오했지만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총칼앞이 아닌 조그마한 어린아이 앞에서 말입니다. 또한 최소한도 수제자라는 명분이 있다면 예수님의 장례는 치루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다 팽개치고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갈릴리 바다로 도망가 고기잡기
에 여념이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요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도 3년동안 늘 주님품에서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죽은 예수를 나몰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모두 주님위해 간이라도 내어줄 것같이 버였건만 모두 거짓말이었습니다. 다 도망하고 지금 몇몇여인들-특히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산 예수님를 만나러 갔다면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만나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시체되어 냄새나는 죽은 예수를 찾는데 이렇게 열중했단 말입니까? 지금이야 주님이 살아계신 분임을 압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당시 예수님이 죽으신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리아만큼 주님께 감사하고 사랑하고 있습니까? 제 자신을 생각해보면 “나같이 세상에 배은망덕한 놈이 있을까?” 죄송함과 부끄러움 뿐입니다. 그러면서 마리아가 한없이 부러웠습니다. 그는 진정한 감사가 무엇인지 알아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는 꼭 이날만의 전매특허는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감사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작년 이 절기가 지난후 오늘 이 절기를 맞이하기 가지 1년, 일년동안 주님께 감사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가? 물론 많이 있겠지만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시려고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비로서 우리는 마리아처럼 죽은 예수라도 사랑하며 감사할 수 있게 될 줄 압니다.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기에 희망도, 소망도 없는 시체가 누워있는 무덤을 아무 대책없이 무턱대고 찾아갔단 말입니까? 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겹습니까? 주님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감사가 성경을 보고 있는 나를 울리고 말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성경학자가 말하기를 요한 8장에 기록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고 합니다. 그녀는 대단히 아름다왔고 또한 고급 창녀였다고 합니다. 뭇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당시 아첨군들이 권력자들에게 진상했던 여인었다고 합니다. 요한 8장에도 이 여인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 7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구체적인 행동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창녀를 이용해서 예수를 궁지에 몰아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돌 하나씩을 들고 흠잡기기만 기다립니다. 만일 예수님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면 ‘그러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당신의 교훈은 무엇이냐?’고 사랑없는 자라고 매도할 참입니다. 여자를 용서하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고 그 돌로 주님을 치려고 합니다. 사실 이들이 노린 것이 바로 이 상황입니다. 예수를 공식적이고 합밥적으로 죽일 수가 있으니까요. 이런 이유로 이 여인이 미끼가 되어 끌려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가막히겠습니까? 창피하고 부그럽고 죽고 싶습니다. 노한 군중들을 볼 때 소름이 끼칩니다. 만일 앞에 있는 이분이 자기를 돌로 치라고 하면 영락없이 죽을 판입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무
덤속에 죽어가는 자기 모습을 상상해 보고는 기가막혔을 것입니다. 이런 절박한 순간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 기다립니다. 그분이 입을 여시더니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고 하십니다. 순간 정적이 감돌더니 한사람 한사람 슬그머니 돌을 놓고 사라집니다. 아무도 보이질 않습니다. 자기를 끌고 왔던 모사꾼들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 때 그분이 조용히 와서 자기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고 말입니다. 여기서 이 여자가 고꾸러졌습니다. “이 못된 여자야. 그래 할 짓이 없어 창녀가 되었단 말이냐? 죽어 마땅하지만 특별히 한번 용서해주니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하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이 무리들이 노호하여 돌로 치려는 상황에서 그 돌을 다 맞으실 각오하시고 - 정말로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실 자격이 있으신 분은 주님 한분 뿐이신데 말입니다.- 치시기는 커녕 부드러운 음성으로 위로해 주시며 죄를 용서해주신 그 사랑에 엎드리지 아니할 사람 어디 있으며 눈물 흘리지 아니할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목석이 아닌 이상, 짐승이 아닌 이상, 아니 목석도 짐승도 차라리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원동력은 바로 이 날의 이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께 대한 그 사랑과 감사가 이 무덤가에서 이렇게 보여지기 전에 마리아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고 그 은혜에 감사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주님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사도중 그 동네 창녀로 소문난 한 여인이 무턱대고 주님 발앞에 꿇어 앉아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씻기더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시몬과 함께 수근대기 시작합니다. 저 여자는 죄인인데 이것을 예수가 모르는 것을 보니 메시야가 이니라는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이 시몬에게 물으셨습니다. ‘5만원 빚진자와 5억원 빚진자가 있는데 둘다 갚을 능력이 없어서 다 탕감받았다. 네 생각에 누가 더 감사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시몬은 즉각적으로 더 많이 빚진자가 더 감사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에게 발 닦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나에게 눈물로 발을 씻겼다고 하셨고 너는 나에게 그 흔한 감람기름조차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나에게 향유를 부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시몬은 죄의 탕감의식이 없었고 이 여자는 죽을 죄를 용서받은 탕감의식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발을 씻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는 말이 상상이 가십니까? 글자 그대로 펑펑쏟은 눈물입니다. 얼마나 자기죄를 용서함 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었으면 이렇게 까지 했겠습니까? 이 여인은 지금 자신이 탕감받은 엄청난 죄 때문에 그것이 고맙고 고마와 자기가 할 수 있는 표현을 가능한한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십자가 대할때에 그일이 고마와 내얼굴 감히못들고 눈물만 흘리도다.
늘울어도 눈물로서 못갚을 줄알아 몸밖에 드릴것없어 이 몸 바칩니다.”
마리아의 심정을 얼마나 잘 표현한 찬송입니까? 눈물로서 그 발을 씻어 드린들 어찌 만분의 일인들 갚을 수 있겠으며 내게 있는 가장 좋은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은들 어찌 억만분의 일은들 그 은혜를 갚겠습니까? 참으로 마리아의 심정이 이러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를 절제할 수 없었던 마리아, 무덤이라도 좋고 시체라도 좋습니다. 주님이 거기에 계시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의 절정이 있습니다. 사실 무덤가가 여자 혼자의 몸으로 갈만한 곳입니까? 마리아는 밤새 잠을 한숨도 못잤습니다. 주님계신 곳에 한시라도 빨리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시간이 안가는 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안식일이 빨리 안지나가는 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또 모릅니다. 무덤에 누워있는 죽으신 주님의 시체를 보기위해 이렇게 밤을 지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죽은 예수는 고사하고 산 예수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밤을 지새워 본적이 있으십니까? 죽은 예수를 만나기 위해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것, 얼마나 얼마나 귀하고 귀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 못해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묘지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 마음또한 보통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랑했던 아내요 남편이라 해도 이렇게 이른 새벽에 찾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섭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것도 불과 엇그제 매장한 시체가 있는 곳으로 말입니다. 날이 밝은 다음, 남자들이 다녀온 후, 신변의 안전을 확인한 후 천천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견딜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미명에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주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감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것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무덤 주위는 또 어떻습니까? 큰 돌이 무덤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이를 굴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예수의 추종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고 부활했다고 소문낼까봐 로마의 군인들이 장창을 들고 삼엄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어쩌면 체포될지도 모릅니다. 더 심하면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달려갑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요 이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더구나 마가복음의 기록에 보면 값진 향품을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알아주시기나 합니까? 주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런것쯤 아까울 것이 없겠죠. 얼마든지 비싼 예물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죽은 시체입니다. 시체에 쏟아 붓는 값비싼 예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예물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 가지고 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 죄사함을 받은 자가 마리아뿐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을 입은자가 어디 마리아뿐이었습니까? 주님으로 부터 구원함을 받고 사단에게 놓임을 받은 자가 어디 마리아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더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최후까지 십자가 밑에 남아있었던 사람은 마리아뿐이었고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도 마리아뿐이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캄캄한 새벽부터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것은 다른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시체라도 좋으니 오직 주님을 한번 더 보고싶은 마음때문이었습니다. 전세계의 금은 보화도 마리아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마리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당연히 있어야 할 주님의 시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음질하여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사실을 고했습니다. 깜짝놀란 그들이 달려와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했다는 누명을 쓰기 싫어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무덤에 안계신것을 보고도 아무감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었고 또 지금 지금 빨리돌아가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외에 갈곳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외에 갈곳에 가는 것이 매우 급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떠했습니까? 11절에 보면 원문에 “그러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집에 돌아가서 마음이 편할런지 모르지만 “그러나”나는 그렇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당신들은 주님이 안계셔도 대단치 않을 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참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 누가 우리 주님을 가지고 갔을까? ” 이제 마리아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한 것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저 홀로 앉아 울고 있을 뿐입니다. 미련이 남아 혹시나 하고 빈무덤을 다시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 때 흰옷입은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이는 기겁할 일이아닙니까? 깜깜한 새벽에 그것도 무덤속에 조금전까지는 없었던 흰옷입은 두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은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놀라지도 두려워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 내 주님을 가져갔는지 모르느냐고 태연하게 묻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그 마음이 온통 주님께만 향하고 있기 때문에 옆에 귀신이 있든 천사가 있든 누가 있는 것 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놀랄여유도 없고 두러워할 빈틈도 없습니다. 주님만 계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에게 물은 후 뒤를 보니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묻기를 왜 울고 있으며 누구를 찾느냐고 합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 인줄 알고 간청합니다. 15절을 봅시다.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
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바로 이 구절이 말씀을 준비하는 동안 나를 결정타로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그 언약한 여인이 시체를 가지고 가서 무엇한단 말입니까? 가지고 가서 안방에 두겠습니까? 건너방에 두겠습니까? 썩어 냄새나는 것은 또 어떻게
하겠단 말입니까? 저는 살아계신 주님도 못 모시는데 마리아는 죽은 시체까지 모시려고 달라고 했단 말입니까? 가지고 간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이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주님의 시체라도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참으로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감사가 어떠해야함은 잘 알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극적인 장면을 봅시다. 주님은 더 이상 마리아를 울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사랑과 감사를 아신 주님 - 이제 마리아에게 자신을 최초로 나타내 보이십니다. 나타나실때 긴 설명같은 것 필요없었습니다. 그저 “마리아야” 한마디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마리아의 반응을 보십시오. 즉각 돌이켜 “선생님” 하며 달려들려고 했습니다. 여러말이 필요없었습니다. “마리아야” 하시는 그 음성속에서 마리아는 꿈에도 그리던 주님을 발견했고 그 음성으로 충분했습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넙적다리를 꼬집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그 한마디에 주님인줄 믿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 음성을 들어보셨습니까? 마리아는 얼마다 행복했을까요? 너무나 부럽습니다. 죽은 예수를 만나러간 마리아, 그녀는 결과적으로 사신 예수를 만났고 그것도 가장 먼저 하나님께 보이시기도 전에 보았으니 이는 세기에 기록될만한 대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기원전 4000년, 기원후 2000년 합 6000년역사에서 예수 다시 사신것을 최초로 보고 증거한 여인이 바로 이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아니하고 그 사랑에 감사 감격하는 사람에게 이같은 신령한 축복을 주십니다. 마리아의 감사가 이러한 놀라운 축복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조차 받지 못한 축복을 말입니다.
죽은 예수를 찾던 마리아를 생각하시고 마리아의 주님향한 사랑과 감사가 오늘 우리 교회에서 공동으로 감사제를 드리는 날에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충만히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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