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복음

[요 12:12] 왕의 입성

'코이네' 2024. 4. 26. 12:40

 

왕의 입성

12:12-16

 

 

오늘은 전세계가 함께 지키는 종려주일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영광스러운 왕의 입성의 즐거움을 온 세계가 함께 나누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머가 참 많으신 분이신것 같습니다. 하챦게 여김받는 분이 임금노릇하신다고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도 빌린 나귀를 말입니다. 당시 로마 가이사의 세력이 천하를 주름잡고 있었고 예루살렘 종교계가 물론 썩긴했지만 당시 정치,경제,종교,문화의 모든 영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그런 시대에 옷도 입던옷 그대로 입으시고 겨우 새끼나귀타시고 내가 왕이다하시며 입성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웃지 않을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 때 그 옆에 있었다면 한참 웃었을 겁니다. “왕 꼴 참 좋다. 저런 사람이 왕이면 나는 황제다.” 하며 조롱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내 살을 먹으라.” “내피를 마셔라” “보혜사 성령이 오실것이다.”라는 등 제자들이 듣기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장면도 그렇습니다. 지금이야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이 다 드러났으니까 믿긴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때 있었다면 초라한 예수를 누가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겠습니까? 정말로 예수님의 입성을 왕의 입성으로 인정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인정을 하든 안하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으며 또한 왕이란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의미를 알기 전에 이 사건이 언제 있었느냐 하는 사실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바로 의미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 사건이 언제 있었습니까? 본문12:1,12을 보니 유월절 절기중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 많은 날 중 복잡한 유월절에 입성하셨을까요? 유월절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미 잘 아실줄 압니다. 유월절의 중심은 양의 피입니다. 애급땅에서 출애급 직전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여부에 따라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익히 잘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월절은 양의 피가 생명을 살린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양의 피라는 점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대속죄일에 등장하는 두 마리 양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7/10은 일년중 가장 특별한 날입니다. 그날은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날은 대단히 기쁜날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의 속죄제를 통하여 1년동의 죄를 한꺼번에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날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속죄제를 받으신다면 물론 그 해는 기쁨의 한해가 되겠지만 만일 받지 않으신다면 저주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비참한 한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으로 부터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날을 준비하되 혼신을 다하여 준비합니다. 그리고 이날은 속죄제를 위해 두종류의 제물이 등장하는데...

 

첫째 제물은 속죄제물입니다.

염소(혹은 양)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여 제사장에게 가져가면 제사장은 양을 잡은후 그 피를 성소에 거쳐서 휘장을 통과하여 지성소의 법괘위에 있는 속죄소에 붓습니다. 그러면 피를 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사인으로 강한빛으로 임하십니다. 초조와 긴장속에 숨막히게 기다리던 순간이 지나고 대제사장의 뒤굼치에 붙은 방울이 울리면 밖에 엎드려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은 일제히 일어나 할렐루야를 외치며 춤을 추며 축제를 시작합니다. 그들의 죄가 사함받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만일 방울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알고 몸에 맨 끈을 당겨 시체를 끌어내고 그 해 백성들은 속죄를 못받은 비참한 한해를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함받은 그들의 기쁨뒤에는 한마리의 죄없는 양이 피를 흘리며 죽었고 그 사실을 축제하는 무리중 아무도 그 양의 희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말버둥치며 슬프게 자기 목자를 울며 부르짖는 그 양의 사지를 잡고 제사장의 날카로운 비수로 그 양의 목을 찌르는 순간 아무흠도 없고 눈과같이 흰 양털이 온통 빨간 피로 범벅이 됩니다. 죄는 이스라엘이 짓고 죽기는 양이 죽은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제물은 버려지는 제물입니다.

이 제물을 일컬어 아사셀 양(혹은 염소)라고 합니다. 이는 버려진 양이라는 뜻입니다. 먼저 제사장이 양에게 안수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양에게 전가시킵니다. 그러면 아사셀양은 백성들의 모든 저주를 대신 한몸에 뒤집어 쓰게 되는 것입니다. 양을 안수하기 전에 한 사람을 미리 선택합니다. 그리고 미리 선택된 한 사람에 의해 양은 끈에 매여 드디어 수난행보를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 감람산을 지나 동쪽 요단강가로 가서 배를 타고 광야에 이르기까지 먼나먼 행보길이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면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아사셀양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아사셀양이 나타나면 갑자기 저주를 퍼부으며 학대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털을 뽑고 어떤 사람은 침을 밷습니다. 어떤 사람은 돌팔매질을 하고 어떤사람은 채찍질을 합니다. 그래서 거리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양은 어느새 털이 다 뽑힌채 피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간신히 예루살렘거리를 지나면 지루한 언덕 감람산을 지나 이제 요단강에 이르게 되는데 질질 끌려온 아사셀양은 요단강에서 배를 탑니다. 차가운 강바람이 털없는 알몸을 매섭게 후려칩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설움에 양은 더 크게 웁니다. 그 양에게는 아마도 요단강물이 유난히도 검푸르게 보였을 것입니다.

 

강을 건너 광야에 이르게 되면 광야 깊숙이 한참을 더 들어갑니다. 어느정도 들어가면 끌고간 사람이 끈을 놓습니다. “잘가라외치며 끈을 놓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와 배를 타고 다시 요단강을 혼자서 건넙니다. 이제 양은 그 험한 광야에 혼자 남게 됩니다.

 

버려진 양은 강가에서 혼자노를 저어가는 목자의 뒷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울부짖습니다. 앞에 놓여있는 강물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강 위쪽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갔지만 거기에는 배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강하류를 향해 뛰어가지만 역시 거기에도 배가 없습니다. 양은 피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다리를 절룩이며 강 위아래를 미친듯이 뛰기 시작합니다. 이제 양은 강을 건널 수 없음을 알고 목놓아 처절하게 울기 시작합니다. “나의 목자여 나의 목자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말입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 집니다. 광야의 찬바람이 뼈를 깍습니다. 피와 가죽이 엉겨붙는 것만 같습니다. 양은 육신의 아픔도 아픔이려니와 목자에게 버려진 아픔에 마구 울부짖습니다. 그 때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인지 사자의 울음소리인지 아련히 먹이를 찾는 맹수의 울음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옵니다. 피냄새를 맡은 굶주림에 지쳐 사나울대로 사나워진 맹수들이 점점 몰려옵니다. 겁과 공포에 질린 아사셀양은 강쪽으로 마구 내달리지만 포위망은 점점 좁혀옵니다. 양은 어찌 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릅니다. 이제 울움소리도 점점 희미해집니다. 그리고는 맹수의 표호속에 드디어 양의 울움소리는 사라져 버립니다. 두번째 양은 그렇게 저주를 받고 죽었습니다.

 

어둠속 강이편에서 양의 최후를 보고있던 목자는 양의 울움소리와 맹수의 표호소리가 그치자 광야의 찬바람을 뒤로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축제중인 예루살렘은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습니다만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아사셀양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첫번째 양은 누구위해 죽었고 두번째 양은 누구의 저주를 대신 받았습니까? 그리고 두 양은 누구를 의미합니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는 외치기를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라고 했습니다. 그 어린양되시는 예수님께서 첫번째 양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두번째 양의 저주로 역시 인류의 저주를 대신하여 받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너무나도 끔직했기 때문에 로마인들도 자국민에게는 시행을 금했고 본국이 아닌 식민 통치지역에서만, 그것도 반역자라든지 도망한 노예, 혹은 극악무도한 흉악범같은 죄수에게만 제한해서 시행하던 사형제도였습니다.

 

재판장이 십자가형하고 언도하면 군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먼저 옷을 벗기고 통포를 입힙니다. 그리고는 끌어내서 십자가를 지우고 사형장으로 끌고 갑니다. 죄패를 든 군인이 앞장서고 삽자가를 진 죄인이 그 뒤를 따라갑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십자가의 무게는 약250Kg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쌀3가마니 정도의 무게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루살렘성에서 형장인 골고다 언덕까지 그 괴로운 길을 어느 시인은 말하기를 고통의 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일부러 꼬불꼬불한 길로 돌아감으로 죄인에게 고통을 더하게 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언덕위 형장에 다다르면 십자가를 땅에 뉘어놓고 그 가운데 사람을 뉘입니다. 그리고 장정 여러사람이 짓누르고 손에 대형 쇠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발을 포개어 역시 대형 쇠못을 박습니다. 못박을때 뼈가 으스러지며 관통하는 그 고통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이 채찍질입니다. 아홉가닥의 쇠가죽의 끝에는 쇠조각과 뼈조각이 맞물려 있어서 한번 후려칠때마다 살점이 패여 튀겨나갑니다. 거의 죽을만큼 내려 치는데 그래야 십자가위에서 빨리 죽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채찍질이 얼마나 혹독한지 십자가가 세워지기 전에 웬만한 사람은 다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겨우 살아있어 십자가가 세워지기라도 하면 몸무게로 인해 손과 발의 못자국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사이로 피가 나오다 못해 이제는 물까지 쏟아져 나옵니다.

 

더구나 유대지방에 작열하는 사막의 태양은 그야말로 글자그대로 불덩어리입니다. 목이 타고 혀가 오그러 듭니다. 출혈로 인한 고열과 경련, 특히 혈압저하에서 오는 무서운 두통은 정말로 견디기 힘들다고 합니다. 만일 목숨이라도

질겨 밤이라도 지내게 되면 추위가 상처를 도려내기 시작하고, 굶주린 모기떼들은 달려들어 피를 빨아먹기 시작하고, 까마귀는 위에서 깍깍대니 죄수들은 그만 미쳐서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현주소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와같은 육신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왜 주님의 손이 못박혔습니까? 우리의 손이 죄와 손잡았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의 발이 못박혔습니까? 우리의 발이 죄를 쫒아갔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의 입이 오그라져야 했습니까? 우리의 입이 죄를 말하고 죄를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의 머리에 가시관이 씌여져야 했습니까? 우리의 머리가 죄를 생각하고 계획하고 경영했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의 가슴이 창에 찔려야만 했습니까? 우리의 가슴으로 죄를 사모하고 즐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주님께서 대신 구체적이고 철저하게 당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십자가에서 혼의 고통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마취제로 쓰여지는 쓸개탄 포도주를 거절하심으로 그 고통을 조금도 거절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만끽하며 죄를 즐겼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께서 굳이 반역자나 도망한 노예에게만 적용되는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까? 이는 우리가 하나님앞에 반역자요 하나님으로 부터 도망해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이 십자가위에서 벌거벗긴채 수치스럽게 달리셔야만 했습니까? 이는 우리가 죄를 범하면서 조금도 수치를 부끄러워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현저한 영광을 만끽했기에 예수님의 혼은 비참한 수치를 당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12:2)

 

뿐만아니라 주님은 영의 고통까지 당하셨습니다.

육신의 고통은 참으실 수 있다손 치더라도, 혼의 고통은 참으실 수 있다손 치더라도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은 영의 고통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22:1,11)

334개월동안 일분일초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이 없었던 주님이신데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함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중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굳이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사셀양의 고난으로 이스라엘의 고난이 면제되었고 속죄양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죽음이 면죄되었듯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의 고난이 면제되었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이 면제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광야로 나간 염소는 이스라엘의 죄를 모두 지고 나갔습니다. 남은

죄라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설사 그 죄를 찾는 이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무인지경으로 갔기 때문에 다시는 발견되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중 얼마를 담당하셨습니까? 50%,90%,아니면 99.99%입니까? 아닙니다. 100%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는 남은 죄라고는 단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그 죄를 찾는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조차도 죄를 찾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

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 지라도 뱔견치 못하리리 이는

내가 나의 남긴자를 사할 것임이니라.(50:20)”

 

여러분들은 모든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다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일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만이 진정한 왕이십니다. 당신의 피값으로 사함받은 모든 자들이 그분을 왕으로 모실 것이요 그 분은 새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왕으로 통치하실 것입니다. 왕으로 입성하신 그 분을 따라 호산나 호산나힘껏 부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