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4:11] 운동력 있는 말씀 _김영대목사

'코이네' 2022. 12. 28. 21:44

 

운동력 있는 말씀  
히브리서4:11-13

 

  주성교회 말씀강론(김영대 목사)  

 

 

신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의 하나가 조직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직신학이란 성경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정리하여 배우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용어도 많이 일반화되어 교회에서도 조직신학을 배우는 예는 흔히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 나라의 장로 교회나 신학교에서 가장 많이 보는 조직신학에 대한 책이 아마 루이스 벌코프가 지은 책일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인간론에 대하여 맨 처음에 다루고 있는 것이 2분설, 3분설에 대한 것입니다.
2분설이란 인간이 두 부분, 즉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고, 3분설이란 인간이 세 부분, 곧 육체와 혼과 영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루이스 벌코프라는 신학자는 3분설은 헬라 철학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2분설이 성경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장로 교회의 대부분은 2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 문제에 대하여 서로 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색하게 되었습니다마는 한때 우리는 사람에 대한 시각이 2분설이냐 3분설이냐 하는 문제로 심각하게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말미암아 교단이 생기고 분파가 형성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는 왜 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조차도 무색하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교회를 키울 것인가 라고 하는 교회 부흥, 성장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 할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서로 좋은 게 좋다고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면 웬만한 신학적인 문제는 서로 양보하고 다투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되는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교리적인 문제는 무엇을 받아들이든지 상관하지 않기로 암암리에 묵인되어 교회적으로는 교회를 부흥시키고 교단적으로는 교세를 확장시키는 경쟁 체제에 돌입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한국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성장이 멈추었다고 보기 때문에 어떤 이벤트를 동원하든지 교회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교회가 숫자적으로 크게 된 것이 물리적인 힘이고 그것이 곧 교리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로 있을 때에 이상한 소리를 내면 교계에서 곧 공격을 퍼붓게 되고 그렇게 되면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작은 교회로 있을 때에는 참았다가 교회가 커지고 나면 목회자는 마음껏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단적인 소리가 되었든 어쨌든 물리적인 힘으로 교계에 대처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성경적인 교리를 정하는 것도 교회의 교세와 비례하고 있습니다. 얼마만큼 숫적으로 큰 교회인가 라고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어떤 얘기들을 해도 그것은 곧 기독교계 내에서 함부로 문제 삼을 수 없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들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보아왔습니다. 옛날에 문제시되었던 교회들이 지금 다 건재합니다. 때문에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2분설이 맞다 3분설이 맞다 하는 어떤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2분설이니 3분설이니 하는 이 모든 주장들이 다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철학에서 왔을 뿐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말미암아 당시에는 치열하게 싸움으로 이견이 제시될 수 있는 것이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새로운 이슈가 자꾸 등장하기 때문에 시간에 묻혀 버리고 상황과 여건에 밀려 우리의 관심사 밖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교리라고 하는 것은 역사와 상황에 의해 바뀌어진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란 바로 당시의 철학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철학적으로 포장된 것을 배우고 그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오래 전에 다투었던 교리적인 문제까지도 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교리를 배우고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을 믿고 십자가의 주님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는 말씀이 바울 사도의 고백이었고 또한 오늘날 성령받은 자의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서 2분설이냐 3분설이냐 하는 문제로 따지고 들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어릴 때에 저도 성경 말씀의 권위나 능력에 대한 근거 구절로 이 구절을 이해하고 외우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우리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권위나 성경 말씀의 능력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그 앞에 언급된 말씀과 연결해 볼 때에 어찌 보면 조금 돌연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9,10절 말씀을 보면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1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통속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면 말씀을 대단히 오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18,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불순종 때문이 아니라 믿지 아니함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때문에 순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흘러나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의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만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집어넣으시기 위하여 만나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떡도 먹고 하나님의 말씀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는 밥을 먹고 영혼은 말씀을 먹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 살게 되는 것을 가르쳐주려고 하니까 만나를 주어서 먹고살게 하는 것이 필요하더라는 뜻입니다.
결국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만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나를 바라보고 만나를 통해 먹고사는 것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없고 그저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는가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던 그 상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2절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는 뜻입니다. 12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말씀은 사람을 2분설로 보아야 하느냐 3분설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근거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을 영과 육 혹은 영과 육, 혼 이렇게 나누어서 말씀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항상 전인(全人)으로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인을 부수고 쪼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쪼개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같은 개념을 좌우의 검에 대비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과 영, 관절과 골수, 생각과 뜻 두 가지 같은 개념을 좌우의 날선 검에 의해 철저히 그리고 완벽하게 쪼개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전인을 철저히 쪼개고 그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무엇을 드러냅니까? 13절에 보면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죄 가운데 죄의 권세에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같이 공개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인간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 때문에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버리게 하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것은 인간의 죄된 수치를 인간은 온전히 가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다 덮을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치를 덮어주실 때에만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오셔야 되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가지고 한없이 자신을 가리고 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계속 죄를 양산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거짓말이 계속 거짓말을 낳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인간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25)라고 고백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공개하시고 드러내시는 차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5:20,21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명령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창 1:3). 결코 빛이 이미 있어서 그 빛을 보고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능력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5에도 이와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어떤 이성적 논리로도 이 사실에 접근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과학적 설명이나 이론으로도 이 사실을 표현해 낼 수 없습니다. 그냥 말씀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말씀의 작용이 단지 처음 창조 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 사역에서도 한결같이 작용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죽어 바짝 마른 뼈가 되어 있는 자를 향해 명령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들을지어다!"(겔 37:4)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마른 뼈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일단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그래서 이성적 존재가 나타나서 언어 해석 능력을 확보하게 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다음에 합당한 윤리적 행위나 종교적 결단을 내리는 것이 상식에 합치되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러한 상식을 가지고 성경을 이해하겠다고 덤벼드는 그 태도 자체가 이미 성경 자체의 말씀과 배치되는 사고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곧 천지 창조 때의 일방적 창조 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게 된 그 방식과 동일한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의 그 말씀과 자기 백성을 죄의 권세에서 구출하실 때의 그 능력이나 같은 능력일 수밖에 없는 것은 같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단순히 우리를 종교적으로 보조하시는 역할이 아니라 세상을 새로이 창조하시는 작업을 실시하시는 것입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이제 죽은 데서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되시는 분이 주시는 생명입니다(요 1:1-5,9).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되시는 하나님이 이 어두움의 세상 안에 들어오셔서 참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따라서 말씀이신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시는 역할은 하나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방식대로 말씀으로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것은 오직 '말씀하심' 그 자체의 능력으로 실시되는 것입니다.


이방인 백부장이 믿음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한 것을 참조하면,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9)와 같이 되는데 이는 상관이 명령하는데 실행되지 않는 경우는 도저히 있을 수 없음을 전제로 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란 개인의 판단에 의해 좌우되는 심적인 현상이 아니라 절대적 권한을 쥐고 있는 분이 내리는 명령에 따라 필히 뒤따르게 되어 있는 순종 현상을 믿음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믿음,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아니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그 말씀의 결과가 우리에게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5:10,11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다면 그 말씀에 따른 결과가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동이 없습니다. 마지막 말씀이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 안에 있다면 하나님이 얻고자 하신 결과대로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집, 우리의 소원, 우리의 목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로 우리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덮으려고 합니다. 많은 공부를 하며 재산의 축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도 이런 우리 자신의 죄악된 수치를 가리려고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손바닥을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장악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선포함으로 그 앞에 우리의 모든 수치심이 날마다 온전히 드러나고 벌거벗은 것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날 때에만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치를 인간적인 것들로 가리고 있는 이상 성도의 교제란 있을 수 없고 함께 기도하며 말씀을 나눈다는 것은 자기 자존심을 세우며 지식의 축적에 불과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