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베드로서

[벧전5:5] 겸손하기는 참 어렵다

'코이네' 2021. 12. 4. 20:47

겸손의 어려움

베드로전서5:5-7


어떤 노래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면 겸손해지기가 너무도 어려운 일이랍니다.” 이 노래의 작곡자가 다소 냉소적이긴 하지만 그의 가사에는 사람들의 행위를 대변하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듯이 행동합니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자신의 성공이나 잘난 모습을 생각하면 어느새 우월감의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젊은이들에게 주는 명령


베드로는 젊은이들이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젊은 남녀들은 마치 자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인 양 처신할 때가 많습니다. 젊은이들은 여러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모든 분야에서 이미 전문가들이 다 된 듯합니다. 그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을 참지 못하고 우월감에 빠집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젊은이들의 이런 경향을 염두에 두고 그들이 장로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권면한 듯합니다. 젊은이들은 첨단의 지식을 연구하였더라도 나이가 드신 교우들을 무시하고 앞장을 서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젊은이들이 교회의 지도적인 역할을 맡아서는 안된다고 시사하는 듯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일은 가급적 삼가야 하고 교회가 그런 직책을 맡기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연장자들보다 학식도 많고 학벌도 좋을지도 모릅니다. 외국에서 학위를 더 많이 받았을 수도 있고 성경을 더 많이 연구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연장자들보다 인생의 경험이 부족합니다. 시편 기자는 나이가 든 사람들의 장점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시37:25)의 두 세계를 다 체험한 것이라고 시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젊은 이들은 청년 시절이 어떤 것인지 만을 알뿐입니다.
성경은 젊은이들이 겸비해야 하며 나이가 더 많은 분들을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현대 사회는 어른들의 권위가 젊은이들에 의해 무시되고 청년들의 오만이 지나친 세대라고 한탄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고대 사회에도 있었습니다. 주전 800년 헤시오드(Hesiod)라는 시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어른들을 존경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인내와 자제를 모른다. 그들은 버릇이 없고 권위를 비웃으며 어른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중에 자라서 어떤 종류의 인간들이 될 것인가?”
본 단원에서 베드로는 5:1-4절에서 시작된 주제를 이어갑니다. 그는 “이와 같이”(5절)라고 말했는데 이 표현은 3:7절에서 남편들의 책임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남편들이 아내들을 사랑해야 하며, 아내들은 남편들을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와 동일한 원리에서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돌보는 겸비한 자세를 가져야 하고, 어른들은 그들을 사랑과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 5절의 교훈입니다.
‘젊은이’라는 표현에는 젊은 여자들도 포함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주로 남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지도적인 입장에 있던 자들도 때로는 그들보다 더 나은 자들에게 복종해야 했습니다. 신자들은 정부에 복종해야 했습니다(2:13-17). 종들은 주인들에게 (2:18-21). 아내들은 남편들에게(3:1-6) 복종해야 했으며 젊은이들은 겸손을 통해 순종을 배워야 했습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주는 명령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성도들은 어른들 앞에서뿐만 아니라 서로서로 겸손해야 했습니다. 바울도 빌립보 신자들을 향해 “겸손한 마음으로 각기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 하였습니다.(빌2:3). 우리들이 서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는 모든 신자들이 귀하므로, 동일한 돌봄과 사랑의 관심이 모든 믿음의 가족들에게 부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가진 책임 가운데 하나는 ‘모든 양떼’가 다 돌봄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양들 중에서 유난히 콧대를 높이고 다른 양들 앞에서 잘난 듯이 으시대는 양을 보는 것은 매우 민망스럽고 슬픈 일입니다. 교회에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육 정도에도 차이가 있고 교회 생활의 연륜에도 장단이 있습니다. 경제적 능력에도 사회적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는 다른 어떤 단체보다도 여러 형태의 상이한 배경을 가진 자들이 모인 집합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잘난 사람들의 수준에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는 성경을 더디 깨닫는 분들도 있고 교리에 익숙치 못한 분들도 있으며 남들보다 재능이 뒤떨어지는 듯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났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그들의 지적 수준이나 경제력이나 혹은 직명을 내세워 미숙한 신자들을 얕본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사도들을 포함해서 극히 기초적인 초등교육만 받은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겸손하게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난 사람이 없고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허리를 동이라.”는 표현은 하나의 천을 몸에 달아맨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노예들은 자유민과 구별하기 위해 하얀 앞치마나 스카프를 옷 위에 별도로 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은 겸손을 자신들의 행위에 항상 달고 다님으로써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권면은 마치 노예들의 앞치마처럼, 신자들이 언제나 겸손의 앞치마를 입고 있어야 된다는 교훈입니다.
베드로는 겸손에 대한 권면을 줄 때, 아마 다락방에서 예수님과 함께 마지막 성찬을 가졌던 때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 때에 아무도 손님들의 발에서 먼지를 씻기는 겸손한 일을 맡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물과 수건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닦아줌으로써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길 차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는 그 일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13:7)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아마 베드로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칼빈은 본 절에서 “우리들이 서로 낮은 자세로 대할 때보다 더 아름답고 또한 아름다워지게 하는 것은 없다.” 고 주석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이 구절은 잠언 3:34절의 인용인데 야고보도 동일한 교훈을 가르치면서 사용하였습니다(약4:6).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시며 교만을 부리는 자를 밀어내십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에게 도대체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만일 신자들이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무엇을 성취했다면 그것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신자들이 어떤 가치 있는 것을 행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주님이 그들에게 그런 지혜와 능력과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롬3:27). 모든 영적 선(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만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손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에 대해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인간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마치 하나님께 손이나 눈이 있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주어진 축복을 말하면서 “야곱의 전능 자의 손”이 요셉 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창49:24).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구원될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출6:1).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에 의한 구원이었다고 찬양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출15:6). 하나님의 오른손은 그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오른손 아래에서 겸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대적하신다는 말씀은 겸손의 주제에 대한 절정입니다. 우리들은 정부 당국에 복종해야 합니다(2:13). 우리는 또한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엡5:21). 그런데 그 누구에게보다도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종하는 자들을 높여 주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낮추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자들의 실례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다 멸하지 아니하셨더라”(대하12:12).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여호와의 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저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니라”(대하32:26). 느부갓네살 왕도 하나님에 의해 겸비케 된 후에 다시 권좌에 앉게 되었습니다(단4:34-37).
한편 우리들은 어두운 구름 밑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암울한 처지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개입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원의 시간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의 구조를 기다리느라고 지쳐 있는 자들에게 주는 본문의 메시지는 ‘낙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위에 사랑의 손을 얹으시고 ‘때가 되면’ 그들을 높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너무 늦을 때까지 방치해 두시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교훈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다 익히 아시는 주님께 겸손하게 자신들을 맡기십시오.”
우리 신자들은 지나치게 염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자들의 의탁이 결여됐다는 반증입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6:25)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의 생활 자원에 대해서 우리가 무관심해야  한다거나 의식주 문제를 가볍게 처리하거나 무계획적인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를 보다 근원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을 염려케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들이 교만하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손에 넘겨 드리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곧잘 “이것은 내손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신자라면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이 우리들 위에 있어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돌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내맡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북부 터키에 흩어져 살던 교인들에게 이런 말로 격려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항상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은 갖가지 상황에 처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본 시를 지은 다윗은 당시 많은 원수들의 추적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러나 그는 자신의 모든 염려와 걱정들을 그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다 맡겼습니다.

 

당신의 모든 근심 걱정을 속죄소로 가져 가세요
당신의 온갖 불안 염려를 하나님의 손에 던지세요
주님 못지실 짐 없고 예수님 같은 친구 없어요         (E.H. 죠이)


우리들은 주님께 자신의 모든 염려를 던지지 못할 만큼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인생 전체를, 우리들의 온갖 염려와 걱정들을 모두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들을 넉넉히 지고 가시는 분입니다( 참조. 마11: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