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자료

[종교개혁주일, 행4:13] 개혁자

'코이네' 2021. 10. 22. 21:37

 개혁자

절 기 : 종교개혁기념주일

구 절 : 4:13-22

 

 

오늘은 199110월 마지막 주일로 474년전 일어났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종교개혁 기념주일 입니다.

 

우리 신교를 가리켜서 신교(新敎) 또는 개신교(改新敎) 혹은 개혁교회(改革敎會)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Reformed Church라고도 하지만 대개Protestant라고 합니다. ProtestantProtest라고 하는 말에서 나온것으로 Protest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항의한다' 혹은 '반대한다', '저항한다'고 하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 신교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저항적인 무리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본래는 중세기 Roman Catholic 교회의 그릇된 교리와 낡은 권위의식에대하여 반대하고, 저항하고 나섰다고 해서 '반항자들'이라고 처음에는 좋지못한 이름으로 불리워졌었지만, 이제 우리 신교인들은 '반대하는 무리', 'Protestant'라고 하는 그 말의 뜻을 그대로 명예롭게 받아들여'Protestant', 곧 저항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형성하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Protestant가 무엇을 위해 저항하는가? 무엇을 저항하고 있는가? 혹은 그 저항하는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교인은 하나 하나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Protestant입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우리 신교인들을 가장 싫어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신교인들을 꺼려합니다. 3.1운동 때에도 많은 우리 국민들이 일본 정부, 혹은 일본의 정책에반대하여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순국한 사람들, 이 일로 인하여죽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90%가 신교인이더랍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항거란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묘지는언제나 고요하며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곳에는 계속 변화가 있고 전통이 있고 그리고 말이 있고 계속되는항거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항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이것이 곧 신교인입니다. 저항은 개혁을 요구합니다.

개혁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500년전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개혁은 있어야 합니다. 개혁은곧 변화를 의미합니다. 변화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특히 생명의 변화에서는 썩지 않으면, 성장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으로 변합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세차게 흐르는 물결 속에서 살아있는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죽은 고기는 물결따라 바다로 흘러 가면서 썩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죽었을 때는 썩어지는 변화가 있고, 살아 있을 때에는 닥치는 어려운 여건을 뚫고 저항해 가면서 성장하는데에 그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적이고 피동적인 변화는 부패입니다. 그것은 타락입니다. 그러나 의식적이요, 창의적이요, 적극적인 변화, 이 선택적인 변화,능동적인 변화 그것이 개혁입니다.

 

생명은 죽음과 더불어 싸우고, 생명은 계속적으로 부패와 더불어 싸워가면서 살아 있음을 나타내고 성장하는 것이 그 특성입니다.

 

개혁 혹은 저항이라고 하는 것을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소화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우리는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을위한 부정입니다. 이 저항은 파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우기 위하고,

 

 

건설하기 위하여 파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혁은 옛 것을 무작정 치워버리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어원을 살펴보면 개혁, 'Reform'이라는 말은 옛 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옛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이것이 개혁입니다. 아는 중에 모르는 중에 벌써 의미가바뀌고 본래의 목적을 상실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사랑, 처음 마음으로, 처음 동기로, 처음 세웠던 목적으로, 그 근본으로 돌아 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인간적인 공로에 항거하여 '오직 믿음으로'라고 외쳤고, 종교적 특권을 반대하고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 직접 하나님께기도할 수 있다고 부르짖었으며, 교회의 잘못된 전통이나 낡은 유전과 권위의식에 대하여 정면으로 항거하여 오직 성서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이를 삶의 기초로 삼은 것입니다. 당시, 모든 권력을 쥐고 행사하던 권력의 중심인 교황청을 향하여 이처럼 대항한다는 것은 놀라운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혁자들은 불의에 대항하며, 부정을 반대하고, 인간적인 거짓과 위선을 항거하며, 우상을 반대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진리(眞理)와 하나님의 의()만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짧은 이야기는 사실상 초대 교회가 탄생하는 종교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지금으로부터 474년전 독일사람 Martin Luther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Calvin에 의하여 정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하여 계속 개혁이 되면서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종교, 개혁신앙을 가진 개혁자들의 특징은옛날 이야기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개혁한다는데 개혁파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생명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예루살렘 제일교회가 창립되는 순간도 알고 보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도 히브리 종교로부터 왔고, 구약성경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당이 개혁되어서 기독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건 자체가 아주 위대한 종교개혁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화된 교회에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 넣어서 성령의 역사로, 생동하는 생명력 있는 교회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정화된 교리, 고식화된종교사상, 고질화된 권위 즉 완전히 형식과 위선으로 빠져버린 부패한 교회에 대하여 이것을 저항하고 새로운 생명력 있는 교회로 개혁을 이루어 놓은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당시의 종교계는 말할 수 없이 부패해있었습니다. 율법이 형식화 되고, 유대교는 Rome의 권력과 야합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물질화 되고, 권력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제물을 팔고, 환전하는 장삿꾼들을 모두 채찍으로 쫓아낸것은, 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값비싸게 매매하고 그 이익을 제사장들에게뇌물로 바치고 또 그것의 얼마가 권력자들에게 상납되는 악의 구조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정치적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결국 평화를 위한 도전이 정치적으로 악용됨으로써 십자가에 달려죽게 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들의 횡포와 거짓, 위선, 외식 등은 다 잘아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산헤드린 법정에서 일장 설교를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이 공회에서 예수를 못박는 결의를 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하는 일생일대의 큰 실수를 범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현장에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다 물리치고 이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이러한 용기와 믿음이마침내 기독교회를 탄생시키고 개혁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의 놀라운 역사는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철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이 그처럼 거짓과 불의를 항거함에 있어서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그들이 어떤 돈의 힘이나 권력이나 무력의 힘을 의지하였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 안에서 그처럼 힘있게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으며 그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있는 자기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을 본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허는데 지금 현재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자신들을 분명히 보았단 말입니다. 이 같은 믿음이 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용기는 거짓된 것이고 만용입니다. 그 지혜는 헛된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이 확실할 때 그 신앙에서 무한한 용기와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Martin Luther는 윔스 회의장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습니다. 재판장은 말합니다. 네가 한 말을 취소할 마지막 기회를 줄터이니 취소하면 살아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으리라는 무서운선언을 합니다. 이때 Luther는 윔스 회의장의 의리의리한 건물을 보지 않았고 살기 등등한 사람들의 얼굴도 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종교 재판을 받는 그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호소하는Luther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작은 말로 그를 정죄하고 있는 여러가지 비난 속에 생명을 가름하는 재판정에 서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O, God, here I stand"

",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

얼마나 굉장합니까? 하나님은 내 편에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위해서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바로 이자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요, 내가 믿는 바가 그대로 복음이요, 내가 하고 있는일이 하나님의 뜻이요, 내가 서 있는 이자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면 이 자리에서 이대로 죽어도 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용기의 사람이 되고 개척자가 됩니다. 여기에 신앙이 있고, 진실이 있고, 의가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쓰시고,제사장을 쓰시고, 그리고 바리새인을 쓰시고, 서기관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즉 종교 지도자를 통해서만 역사하시는 줄로만 알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지않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요, 보잘것 없는 초라한 학문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쓰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지난 날에 자기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고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민을 구원하시는 큰 역사는 보잘 것 없는 나도 들어 쓰신다고 하는확실한 개인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 개인적인신앙이 마침내 엄청난 개혁의 역사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둘째로는 말씀의 재인식, 재발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을 믿고, 예언을 믿으며 선지자들을믿고 있지만 그 예언이 오늘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극단적인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은 마치 무지개를 따라 가는것과 같다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무한히 미래적인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생각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그 예언이 오늘 현재여기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도 응답이요, 십자가사건도 말씀의 성취요, 방언의 역사도 요엘서에 대한 응답입니다. 심지어

 

 

자룟인 유다가 예수님을 판것도 예언의 성취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내 생활 현장에서 성취되고 있고 응답되고 있다고 믿기에 그들은어려운 환란 속에서도 핍박을 무릅쓰고 큰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Martin Luther도 한 때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할 수 있을까?"하고금식, 기도, 고행 등 사람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하였지만 여전히 마음의 평화를 못 채고, 구원의 확신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의의 하나님 앞에서죄인으로서 불안, 공포, 절망 만이 그를 사로잡아 괴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서를 주석하는 중에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 "의인은 믿음으로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얻게 되는 것이아니라 전혀 밖으로 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나 공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인간을 사랑하셔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되는 진리를Paul의 복음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Luther의 죄와 놀라운 범죄의식과의 내적 투쟁은 복음의 재발견으로 끝을 맺고 더 나아가 종교개혁의 과업을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판단하라" 그들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좋게 하기 위하여 사람에게슬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는잘못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의 어떤 제도에 대하여 그들은 항거합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법, 사람의 마음을 초월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오늘을 살면서바로 이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고 확실히 믿고 일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에서 오는 그 기쁨, 이것을 유일한행복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정죄해도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시면 그만입니다. 세상사람 누가 나를 비난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러한일을 하고 있다면 무서운 용기와 담력을 얻게됩니다. 내 죽음이 하나님의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확실하다면 어찌 그 죽음인들 슬퍼하며 또 저주하겠습니까? 종교 개혁자들은 이것이 분명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위하여 살았으며 그들의 수고와 희생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명확하게 알고 또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추호의 주저함도 없는 용기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반항적인 용기는 돈 때문도, 그의지식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믿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처럼용기있는 항거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재판정에 나가고자 하는 Luther에게 그의 친구가 말렸습니다. 그 때에Luther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윔스 회의장의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기쁨을 주면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다른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저항은 생명의 표시입니다. ''를 따르고자 하여 불의에 항거했습니다. 진리를 위하여 비진리에 항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완전히 힘입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힘이요, 용기요,생명입니다. 불의가 진리를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잠깐일 뿐입니다.

아무리 어둡다 하더라도 그 어두움이 빛을 이겨 본적은 없읍니다. 모든 사

 

 

람이 다 반대한다 하더라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찬성한다하더라도 불의는 불의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갈때 이 개혁자와 함께 하시고, 이 개혁적인 신앙을 가진 자와 하나님께서 언제나 동행하여 주시며 그를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목적도 방향도 없이 변해져만 가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 모두'하나님의 의'를 위한 개혁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변화무쌍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의와 불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이런 혼탁한 세대에 사는 저희들, 내가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주님을 향하게 하시고, 또 본래 시작했던 그 목적과 일치한 길을 가게 하시고, 주의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며 주의 거룩한 의를 따라서 진정으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게 하셔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따라 개혁적인 신앙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교회와 국가와 심령과 가정을 개혁할 수 있는 개혁적인 역군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배에의 부름>

시편 34:15-19

하나님 아버지,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니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 길을 걷기 위하여 적극적인 경건의 연습이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한 우리의 자세가 다시 안일과 타성에 흘려버리지 않게 하시고, 헐벗고 눌림받는 형제들을 위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사울 수 있도록 용기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경건히 앙모하는 곳에 모든 불의 가 물러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