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복음

[요1:43]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_김기홍 목사

'코이네' 2021. 8. 17. 17:56

그리스도의 눈

본문 : 요한복음 1:43-51

설교 : 김기홍 목사

 

 

 

처녀와 총각이 사랑에 빠지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되는가? 물론 굉장한 변화가 나타난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이다. 어제까지 아무 것도 아니던 것이 별안간 아름답게 보인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하나도 예사롭지 않고 너무도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다. 아무 것이나 맛있고 무슨 일이나 기쁘다.어떤 사람이 신자가 될 때 무엇이 달라지는가? 거듭나면 무엇이 근본적으로 변하게 되는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되는 것이다. 나 자신도 처음 거듭남을 경험한 뒤에 모든 것이 전혀 달라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차츰 이 감격이 약해지면서 보는 세상을 보는 눈도 서서히 전과 같아지고 말았다.왜 그렇게 되고 말았던가? 그 감동적인 시력이 감퇴되어 버리고 옛날 보던 것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히 옛날로 돌아간 것은 아니므로 오히려 갈등만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왜 옛날에 깨닫고 느끼던 것이 이제는 없나 하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의 하나님 보다는 애굽의 아름다움을 사모하게 되는 것과 같다.신자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 주어진다. 영적인 세계를 감지할 수 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 눈을 더욱 더 훈련시켜 나간다. 그러한 눈은 그저 평범한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에서도 모기 한 마리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되며 그분을 만나게 된다. 아직 안보여도 믿음으로 보는 것이다.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보다 세상의 어느 석학이나 전문가보다도 더 훌륭한 눈이 생긴다. 하나님의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눈을 통해서 뇌 속으로 전달되는 방법이 아니다. 마음에서 눈을 통해 사물로 가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정 반대의 통로이다. 이 눈으로 우리는 모든 사물에 대한 정리를 다시 내리게 된다.이 눈으로 나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이웃과 교우들을 보기 시작한다. 그들은 더 이상 싸울 대상도 비판할 대상도 아니다. 가족에 대하여도 다른 눈이 생긴다. 더 이상 이기적으로 사랑만을 요구할 대상이 아님을 안다. 사업에 대해서도 다른 눈이 생긴다. 하나님이 함께 사업을 한다는 확실한 이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세상 것만 보이고 거기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고 하니 결과적으로는 욕정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 눈으로 보는 세상의 색깔은 너무도 어둡고 침침하다. 그 눈으로 보는 인간들은 너무도 악하고 더럽다. 아무리 보아도 한 가지도 사랑할 이유가 없다. 세상은 너무 황량하고 외롭고 한스럽다.

 

우리가 바라는 상태는 이제 이 영적 눈이 분명하게 열려져서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세계를 확실히 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영적인 소경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이점을 말씀하셨다.(8) 그러나 우리는 어렴풋이 보는 사람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이 눈이 밝아져서 확실히 보기를 원한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눈을 갖는 것이다.그리스도가 어떻게 보았던가? 우리처럼 눈 앞의 것을 보면서 너무 쉽게 좌절하고 낙심하며 사람들의 약점만 보고 나쁜 점만 들추어 내던가? 사실 우리의 삶 자체가 죄악밖에 아무 것도 없기에 얼마든지 욕먹을 내용뿐이다. 우리가 우리를 보아도 부끄러운데 하물며 하나님이 보신다면 얼마나 한심한 존재이고 죽어야 할 존재인가?그러나 그리스도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믿음의 눈을 가지고 모든 것을 보았다. 아무 것도 없지만 그는 보고 있었다. 천지가 나타나기 전에 인간도 나타나기 전에 그는 만물을 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진 것을 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을 보면서도 산 자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언제나 가능성을 보았다. 누가 보던 작은 가능성이지만 그에게는 완전한 가능성이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은 가능한 것이다. 그는 바로 이 가능성에 자신 전체를 쏟아넣었다. 자신의 평생을 바치고 고귀한 생명을 제물로 드렸다. 그리하여 인간들의 빚을 갚아주고 죄악의 댓가를 대신 담당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그는 사랑의 눈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았다. 늘 우리는 죄에 다시 빠지고 늘 좌절한다. 내가 하나님이었다면 얼마나 나에게 실망하고 울화가 치밀어 벌을 주고 또 주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부모의 눈으로 나를 보았다. 주책도 좋게 보며 죄를 지어도 참고 기다리셨다. 내가 좌절할 때도 하나님은 좌절하지 않고 말씀을 공급하셨다.

 

오늘의 본문을 보라. 두 사람의 보는 눈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 나다나엘이 예수를 볼 때 선입견이 있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는 한 마디로 구세주를 우습게 보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빌립이 그를 돕는다. 빌립도 다른 눈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그러지 말고 한 번 와 보시오."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자 예수는 자기의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는 그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고 그에게 가능성을 두었다. 그의 선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였다. 그러면서 나다나엘을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남의 비판과 욕을 하는 것을 본다. 그렇게 해서는 않된다. 이것은 옛사람의 행동이요 옛사람의 눈이다. 이제 신자는 그것을 벗어난 사람들이다. 옛날의 그러한 상태로 돌아갈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명심하라. 내가 뒤에서 하는 비판은 그 사람 앞에 서 극렬한 욕하는 것과 같다. 반드시 본인에게 전달이 된다.뒤에서 하는 말이 본인 앞에서 하는 것과 같다면 차라리 칭찬하는 것이 낫다. 그것도 결국에는 본인에게 전달이 된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악해서 나쁜 말만 덧붙여 전한다고 하자. 그래도 열 마디의 좋은 말중 한 마디라도 전해주지 않겠는가. 그 한 마디면 관계는 훌륭하게 전개된다. 모두에게 나는 남의 말 좋게 하는 이로 인식을 시키라.

 

[리더스 다이제스트] 12월호의 한 내용이다.

한 중학교 여교사가 경험한 일이다. 학생들이 수학의 어려운 것을 배우느라 지쳐 있었다. 서로들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다. 더 이상의 수업이 진행될 수 없었을 때 그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종이에 자기 이름을 적고 거기에 반 아이들 이름을 모두 쓴 뒤, 그들의 좋은 점만을 기록하라고.그들은 한 시간 내내 썼다. 그 쓴 내용을 교사는 집에 가지고 와서 각각의 이름을 쓰고 옮겨 적었다. 그리고 다음 날 돌려주었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이 자기의 좋은 점을 말한 것을 보고 큰 격려를 받았다. 그들은 평생토록 그 종이를 품고 다니면서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그 종이는 그들을 강하게 하였고 훌륭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그를 격려하고 좋은 관계를 맺게 하는지. 나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교회는 이러한 교회이다. 서로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격려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하여 영원에 이르기까지 순례의 길을 도와준다. 우리는 아름다운 교회의 일원이다!

 

이제 우리는 굉장한 눈을 가졌다. 그리스도의 눈이다. 그것을 주장하라.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라. 그것으로 모든 가능성을 찾아내라. 그 눈으로 우선 자신을 살펴보라. 정말로 이 눈을 가졌는지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 화목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과 마음을 가졌는지. 이 눈을 더욱 더 강화시키라.대인관계에서 이 눈을 사용하라. 사업에서 교회 활동에서 가정에서 아니 삶 전체에서 이 눈으로만 보라. 믿음의 눈, 마음의 눈, 사랑의 눈, 그리스도의 눈이다. 절대로 좌절하지 말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이 아름다운 눈을 더욱 더 빛내라. 이 눈으로 삶의 모든 면을 바라보라. 구석구석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어루만지라.격려의 말씀,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있다.

 

우리는 무디게 비판하고 예리하게 칭찬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방법이다. 욕하지 않는다. 언제나 칭찬과 격려만이 나온다. 제자들은 언제나 어느 장소에 가거나 저주를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평안을 선언한다. 축복을 외친다. 우리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수 있는가. 오직 축복만이 나온다.이제 우리도 그리스도의 눈이 주어졌다. 그것을 사용하라. 옛사람의 눈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믿음으로 보는 습관을 가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