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6:24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십자가를 지는 것은 메시야가 가야 될 길이라는 사실을 밝히신 주님은 이제 자신의 제자들도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대원칙을 밝히고 계십니다(24절) “이에 제자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즉. 예수님의 제자된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가로막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지신 십자가에 스스로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신. 그리고 우리에게 지라고 명령하신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 합니까? 아마도 예수님께서 지라고 명령하셨으니 언뜻 보기에 지게나 배낭처럼 짊어지고 다니는 짐처럼 생각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짊어지고 다니는 짐이 아니라 죽음의 도구를 의미하였습니다. 그것도 흉악한 범인을 처형하는 사형틀로서 최대의 수치를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그리하셨듯이 제자들도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처형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제자된 자들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부인함으로써 자아가 소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자아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이 가능케 됨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 즉 자아의 일을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단의 일로 간주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여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든지 아니면 사람. 곧 사단의 일을 생각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좇든지 아니면 사단의 뜻을 좇든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든지 아니면 사단의 다스림을 받든지. 이들 둘 사이의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 둘 사이의 선택을 요청받는 긴장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롤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6:38-39). 그리고 주님의 이러한 삶의 원칙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그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의 겟세마네 기도의 주제는 너무나도 단순하였습니다. 즉, 십자가를 지는 것이 인간적인 입장에서 너무 힘든 것이지만. 그러나 그 주제가 그처럼 단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와 결단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기에. 동일한 기도를 세번이나 반복하였고. 기도하는 중 그의 이마와 손등에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 즉. 인간의 뜻이 죽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결단의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뜻대로. 혹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라는 말을 남용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말을 하기에 앞서 우리의 겟세마네 기도와 결단이 선행되었는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한 표현들은 내 자신의 철저한 부정과 죽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상에서의 자기 죽음의 현상과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게 될까요?
첫째. 고난과 투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전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던 것들이 내 자신이 죽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을 주관하게 됨에 따라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이전에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주고받던 뇌물이 십자가를 진 다음부터는 결코 마음 편한 물질이 되지 못합니다. 이전에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내뱉던 더러운 말들도 이제는 결코 유익한 것들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전에는 무감각하게 넘어갔던 사회적 불의함들도 십자가를 진 다음부터는 나를 괴롭히는 요소들로 바뀌게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적. 가정적. 사회적 투쟁과 고난의 현상들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왔노라 내가은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4 - 36)”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한.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전과 동일하게 불의한 세상과 화목하며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진 후 감수하고 있는 투쟁과 고난이 무엇인가? 만일 우리의 삶이 세상일들과 관련해서 너무 무사태평하다면.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악한 일들과 관련해서 아무런 번민도 없다면. 우리의 영혼상태에 무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기로 결단한 이래로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역경과 싸워 오셨다면. 오히려 그것을 기쁘게 여기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지심이 결코 안이하고 편안한 사건이 아니었고. 엄청난 수치와 고동과 고난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수반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포기하고 버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 찾아온 한 부자 청년의 모습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여 지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덜에게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고 주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부자 청년은 깊은 고민에 빠져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치 기준에서 재물은 지극히 귀중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고. 더욱이 그는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에게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의 재물에 대한 가치 기준의 변화로 말미암은 그 재물의 포기로 요구되었고. 그 요구를 순종하지 못한 그에게 영생은 주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마19:16-30).
그렇다면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어떤이는 재물을. 어떤이는 지위와 명예를. 어떤이는 승진의 욕망을. 어떤이는 가족을, 어떤이는 건강과 심지어는 육체적 생명까지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10:37-38).”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포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마태복음 13장 44절의 감추인 보화 비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즉 그 농부는 하나님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자기 소유를
모두 다 포기해버리는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포기하는 대상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재물 뿐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재물과 재능과 지식과 지위와 가족, 그리고 생명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포기되어지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소유권이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포기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소유권하에서 새로운 의미들을 갖게 되기들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보화를 발견한 자가 자기 소유를 모두다 포기 할 때 슬픈 마음을 가졌거거나 아니면 손해본다는 식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들을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포기하는 십자가를 질 때 생색을 내거나. 따져 보거나. 아까워하거나 마지못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결코 바른 태도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그 결단이 쉬운 것은 아닐지라도 그 기본적인 자세는 기쁨으로 가득차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해야 할까요? 그것은 자기 부정과 죽음의 십자가를 진 결과가, 우리가 포기한 소유들이나 우리가 당한 고난과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나게 값지고 고귀한, 그리고 영원한 대가인 하나님나라, 즉 영생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본문 25절의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이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의라” 이는 세상법칙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역설적인 언급이지만. 그러나 이는 곧 십자가의 비밀이요. 기독교 진리의 신비스런 측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도 먼저 십자가를 지는 자기 죽음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결코 영생을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이는 고난없이 축복만을 바라고, 자기 부정없이 영생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해본 부자 청년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영생이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적인 자기 포기가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에 관한 기록에 뒤이어 나타나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부자 청년의 경우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아오니. 그런즉.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렇게 볼 때 25절의 이 역설적인 말씀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신비한 진리인 것입니다.
바로 이리한 사실에 근거하여 바울은 고린도후서 4 장17-18 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우리가 잠시 밭는 가벼운 고난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크고 엄청난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올 바라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한 갈라디아서 2 장 20장에서 다음과 같이 용기있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처럼 이미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못밖힌 십자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매 순간마다 십자가에 우리스스로를 계속 못박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속에 옛사람과 새 사람이 항상 투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매일 죽는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3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라고 요구하시는 우리의 십자가가 당장에는 어려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볼 때. 그 십자가를 짐으로써 우리에게 보장된 약속은 그 십자가를 짐으로 당하게 되는 그 어떤 고난이나 손실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시간 우리 모두에게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길.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지기에 쉽고 가벼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그로 말미암아 당하게 되는 고난과 수고를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게 될 뿐 아니라. 결국 우리가 얼게 될. 그리고 이미 얻은 영광스런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by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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