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복음

[요 3:14] 순종과 믿음 _홍성현 목사

'코이네' 2025. 8. 2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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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믿음

21:4-9 3:14-21

설교 : 홍성현 목사 

 

 

요한복음 본문에 소개되는 예수님의 대화의 상대는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의 이력은 대단합니다. 이스라엘의 최고회의인 산헤드린의 정회원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최고의 통치기관의 위원이 되려면 공부도 많이 했을 것이고 돈이나 가문의 빽 또한 무시하지 못할 만큼 대단했을 것입니다. 모두 72명으로 구성된 최고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위세가 얼마나 당당했을 가는 짐작이 갈것입니다. 바로 이런 지체 높으신 분이 어떤날 밤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때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한지 약 석달쯤 되는 때였습니다. 두 번째로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관해서 관심을 표한 때는 그 이후 약 2년 반 경에 산헤드린 공의회 석상에서 였는데 그때 그는 예수님쪽에 서서 변호하였습니다(7:50). 그리고 세번째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 동료위원인 아리마태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묻어주었습니다(19:39).

 

 

이런 기록을 보면 예수님 공생애 3년간 그는 예수님에 관하여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높은 관직에 있었기에 그의 처신이 매우 신중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의 영성의 깊이는 조금씩 더해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직한 구도자로서 예수님 앞에 나타났었고 다음에는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쪽에 서서 옹호 발언을 했었고 마지막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노출시키면서 까지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는 일을 했습니다. 결국 드러난 예수님의 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도덕적으로 말하면 매우 경건한 종교지도자였고 사회적으로는 최고의 산헤드린의 위원으로서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선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함과 또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있음을 스스로 믿었기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예수님께 관심을 가졌었고 그리고 위험을 무릎쓰고 밤중에 예수님을 몰래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신에 대한 선의식이 그로 하여금 그가 서있는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로 그는 매우 진지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현실로부터의 과감한 탈출은 시도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자신이 착하게 산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일 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받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인간의 성취에 만족하면서 스스로 의인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은 어떤 메시아도 필요치 않는 법입니다. 스스로를 완전한 도덕군자로 알고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지를 않습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진솔한 구도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란 분의 명성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그는 예수님에게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가 놀라운 기적을 통하여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분이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알고,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했습다. 그래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밤에 조용히 예수님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말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압니다. 아니면 그런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가 없겠지요" 이렇게 운을 떼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그의 생각을 찔렀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최고의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고, 종교적인 선생으로서 손색없는 착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 자기야 말로 하나님과 통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니!" 이 무슨 해괴한 말씀인가? 그는 저으기 놀랐을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지금의 존재, 그의 사고, 그의 마음, 그의 삶 전체를 뒤바꾸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시니, 이 말씀은 니고데모의 오늘을 완전히 부정하는 말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가장 앞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착하고 선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의 자신을 포기하고 다시 탄생해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니! 이건 너무 지나친 망발이 아닌가? 니고데모는 이 순간 정신이 아뜩했을 것입니다.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한 말은 "어떻게 사람이 두 번 태어날 수 있습니까?" 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책망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제까지의 바리새적인 지식, 사고, 전통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없다고 못박았습니다. 그리고는 핵심적인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이유는 "들리운 인자를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함이다"(14) 이 말씀의 핵심은 곧 십자가에 달릴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봄으로써, 즉 그를 믿음에서 새롭게 거듭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는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위에 높이 세웠던 놋(구리)뱀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지나갈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21). 광야의 길이 너무나 험하여 힘들게 한발자욱 두발자욱 떼어 놓으면서 고생 고생하면서 걸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뜨거운 사막의 태양 열기에 현기증이 나고, 배는 고프고, 목은 갈해 타들어가고, 앞길은 가도 가도 끝없는 망망한 모래밭 만이 펼쳐져있으니 그 엄청난 고난의 여정을 누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백성들 사이에서 원망과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자기네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는 커녕, 원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장을 선 모세와 다른 지도자들에게도 항의하고 원성을 퍼부었습니다. 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백성들 전체에 악 영향을 끼칠 정도로 원망과 불평이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들 가운데서 본보기로 악질적인 선동자들을 독뱀을 풀어서 물게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뱀에 물려 지금 죽어가고있는 사람들을 살려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여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게 하고 그 구리뱀을 쳐다보는 자는 모두 산다"고 일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아 놓고 물린자들을 찾아 다니면서 빨리 나가서 구리뱀을 쳐다 보라고 외쳤습니다. 그 말에 순종하여 높이 달린 구리뱀을 쳐다본 자는 다 살았지만, 제 고집과 생각을 꺾지않고 "허튼 수작마라. 저 따위 구리뱀이 어떻게 우리를 살려. 웃기지 마!" 하면서 고집하고 순종치 않고 구리뱀을 올려다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습니다.

 

 

놋뱀 자체에 독뱀에 상한 자를 살리는 효혐 있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아니면 불순종 하는가에 인간의 생사의 문제가 달려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독뱀에 물린자들에게 알려주려는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살고 순종치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을 사랑하여 노예에서 구원시켜주시고 지금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중인데 자기네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지금도 가나안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무조건 순종하면 되는데, 일부 사람들이 자기들의 잔머리, 잔꾀, 그 잘란 똑똑한 머리를 굴리면서 자기네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의심하고 거부하고 있기에, 하나님이 저들을 징계하신 것입니다. 자기들의 주장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한 섭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반대로 이제라도 마음을 돌려서 제 고집을 꺾고 하나님앞에 머리숙여 온전한 순종을 하면 살려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일부는 참회하고 제 고집을 꺾고 구리뱀을 쳐다봄에서 살았고 나머지는 끝까지 제 고집과 제 생각만을 고집하다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싯점에서 이 옛 이야기를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요? 지금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무엇을 알려줄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에의 순종입니다. 이제까지의 니고데모 자신의 철학, 견해, 관습, 전통을 접어 놓으라는 충고입니다. 니고데모 자신을 기준하지 말고 나무에 달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장대에 달려있는 구리뱀을 쳐다봄으로써 죽음에서 건짐을 받은 것 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쳐다봄으로써 죽지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를 선포하시고 계십니다. 이 길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의 길임을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천명하셨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을 쳐다보아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유대인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상식은 나무에 달린자는 저주를 받은자입니다. 고로 나무에 달린 예수를 쳐다 볼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외면해 버려야 하는 대상입니다. 이것은 마치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전통과 상식으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전1:22절에서 헬라인은 지식을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선언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철학과 이성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했고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바라다가 예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무에 달린 예수를 쳐다보고 믿고 순종함에서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초대교회를 이룩하였고 오늘의 세계적인 교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싯점에서는 예수님의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한채 경청하였습니다. 아직 내용을 충분히 파악은 못했지만 진지한 모습으로 들었습니다. 그 이후 2년 반이 지난 때에 예수님을 산헤드린회의 석상에서 변호하는 모습을 보면 계속적으로 예수님에 관해서 관심을 지녔었고 그를 변호하다가는 자칫 반역의 공모자로 몰릴 위험을 알면서도 그를 변호한 것을 보면 그 첫 대화의 영향이 계속적으로 그의 마음을 맴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옛 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즉 거듭나는 삶을 살지를 못했습니다. 아직도 옛 틀에 그대로 기초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과감히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지를 못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 보다는 자기의 명예와 직위가 더 좋았고 그것들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니 당대의 바리새적인 율법주의를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생보다는 지금의 삶이 더 좋으니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공생애 거의 끝에 가서 예수님의 체포 문제로 산헤드린 최고회의에서 옥신각신 논쟁이 벌어졌을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편에서 변호를 했습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전에는 판결할 수 없다(7:51)" 라고. 그 무섭도록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감히 누가 예수님편에 서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그를 정죄하고 있는 회의에서 오직 니고데모 만이 대담하게 예수님의 편에 서서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비록 아직까지는 들어나게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의 마음은 계속 예수님께로 기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갖은 고난을 겪으시고 운명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을 때 니고데모는 그 죽음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나무에 달린 예수님을 쳐다보았습니다. 유대의 상식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행동을 니고데모는 하고야 말았습니다. 독사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쳐다보아 살았듯이 이제 십자가 나무에 달린 예수님을 니고데모가 우러러 쳐다 봄으로서 거듭나는 체험을 하게됩니다. 이제 그는 다시 살았습니다. 이제 그는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약 3년전 그 밤에 일러주신 말씀대로 나무에 달린 예수님을 쳐다보았습니다. 자신의 지위도, 전통도, 자신의 모든 기득권 모두를 버렸습니다. 이젠 하나님의 말씀만에 순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나무에 달린 예수님을 쳐다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시신을 거두어서 돌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젠 모두에게 알려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거듭난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고집, 자기의 관습, 자기 판단속에 갇쳐서 사는 성도들이여! 나무에 달린 예수를 쳐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서야 거듭나는 체험이 있고 그리고 영생이 허락됩니다. 니고데모의 마지막 단계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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