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복음

[요 19:28] 예수의 고난과 신앙생활

'코이네' 2024. 11. 5.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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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고난과 신앙 생활 

본문/19:28-30

 

 

봄기운이 완연한 좋은 계절에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과 신앙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이 한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고난의 한 주간을 살펴보면, 주일날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셨고(19:28-44), 월요일에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11:12-14) 그리고 성전을 청결(마가 11:15-29)케 하신 사건이 있었으며, 화요일에는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고(23:37-39) 가룟유다의 흥정(14:10-11), 수요일에는 예수님에 대한 음모(22:1-6), 옥합을 부은 마리아의 사건(14:1-11)이 있었으며, 목요일에는 성만찬과(22:7-53), 겟세마네의 기도(마가 14:32-46), 금요일에는 빌라도의 심문(23:1-5), 십자가의 죽음(15:16-41), 토요일에는 무덤에 계셨다가(15:42-47), 다시 주일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사에 있어서 이 한주간에는 가장 엄숙한 기간이고, 이 주간을 통해서 주를 위해서 충성된 결단을 갖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의 사실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신앙생활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고난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39680년 까지 사역했던 선지자로 약650년 후에 있을 예수그리스도의 사건 등을 예언했고,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구약성경 가운데는 300여번이나 예수가 오실 것을 예언했고 이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경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목마름을 당하셨으며, 징벌을 받고 멸시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3:3절 말씀에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당시 로마 사회의 극형에 해당하는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형은 흉악범이나 정치범들에게 사용했던 사형틀인데, 유대인들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은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은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21:23).

그러나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19C의 위대한 시인이었던 롱펠로우는 결혼 후 얼마 있다가 아내가 죽었습니다. 다시 재혼을 했는데, 이번에는 재혼한 아내가 화상을 당하여 오랫동안 고생을 하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어느덧 75세가 되면서 기자들이 와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은 저희들이 볼 때에 고난의 삶이라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아름다운 시를 쓸 수가 있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때 롱펠로우는 정원의 사과나무를 보면서 죽은 것 같으나 매년 어김없이 꽃을 피고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부활하신것 처럼 주님의 새생명이 나와 함께 계셔서 죽었으나 새순이 돋아 꽃을 피고 열매를 맺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예언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한가지 남은 것은 예수님의 재림만이 남았는데, 이것 역시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 바 된 것은 예언의 성취요, 그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 뿐만이 아니고, 현실에서도 구원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막힌 것을 풀어주시고, 질병에서 건강을 주시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등 현실에서도 구원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뿐만아니라 영적인 구원은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심령에 평강을 주시며, 죽음에서 영생을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벧전2: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저주를 받으시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고, 예수께서 고통을 받으시므로 우리가 치료를 받았으며,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구속함을 얻었고, 예수께서 부활하시므로 우리가 새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죤 뉴톤은 청년시절에 못된 짓을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을 잡아다가 쇠사슬로 묶고 이 흑인들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말을 안 들으면 채찍으로 때리고, 반반한 여인은 욕을 보이고 등등 온갖 못된 짓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이 은혜가 감격하여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걸어가도, 밥을 먹어도........, 눈물을 흘리다가 나 같은 죄인도 용서 받을 수가 있을까?” 하고 반문하며 기도하다가 찬송가 405장을 작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후 그는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다가 82세에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천국에 갑니다하고 고백을 하면서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랄 일이 있을 것인데, 첫째는 생각 밖의 사람들이 천국에 왔을 때 그것으로 인해 놀랄 것이요, 둘째는 천국에 갔으리라고 믿었으나 못 오고 지옥에 간 사람들 때문에 놀랄 것이며, 셋째는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 나라에 갔으니 감격해서 놀랄 것이다라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를 잘 믿는 척 했어도 천국에 못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못 갈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천국에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사실을 믿고 영접할 때 천국에 가는 것 입니다(1:12,5:24). 사람들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님의 양편에는 강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은 비방하여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렇다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조롱하였습니다(23:39). 그러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23:40-43).

우편 강도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흉악한 강도의 모습이요 죄인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죄를 회개하고 변화된 신령한 모습입니다. 그는 감격 스러웠을 것이고 빙그레 웃으면서 임종을 했을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은 세상의 그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21세까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불교 집안에 예수님을 모르고 자라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청년 산상집회에 친구가 가자고 해서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성령의 역사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적으로는 잘못한 것이 없고 어리석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니까 어리석고 못났고 잘못된 것이였습니다.

43:1절에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가슴에 부딪쳤습니다.

 

사람들은 결혼의 초기와 후가 달라집니다. 결혼초에는 아내들은 칫솔에 치약을 짜서 바치고 수건을 대령하면서 시중을 들다가 아이를 하나 둘 낳으면, 수건을 달라고 해도 거기 있으니 가져가요!”하면서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온갖 달콤한 말로 칭찬을 하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이 말에 안 넘어갈 여자씨 들이 없으리 만큼 좋은 말은 다 골라서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말들이 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세월이 가면 변하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사랑이 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치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을 완성하시고 내가 너희를 품어주고 안아주리라했습니다. 49:15절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49:16절에서는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 엄청난 은혜, 이 놀랍고도 엄숙한 은혜가 우리의 심령에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28:18-20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소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해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구원받은 은혜가 감격해서 이고, 둘째는 전도의 책임이 있어서 이며, 셋째는 영혼을 사랑하라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감옥에 가도, 사자굴에 집어 넣어도, 불속에 쳐 넣어도, 몸을 찢어 죽이고, 목을 쳐 죽여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우리도 구원 받은 이후의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10: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했습니다. 어떤 수양이나 도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젊어서 실컷 재미를 보다가 죽을 때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지 않겠느냐?”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런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자는 주께서 죽을 자리에서도 살려주십니다.

 

내가 어릴적에 어머니나 주위 사람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보고 애비잡아 먹고, 누이 잡아먹은 놈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난지 여덟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만에 누이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독히도 미움을 받고 자랐습니다.

홍역을 하는 조카 이불 속에 나를 집어넣고 죽으라고 하였지만, 조카는 죽고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분명 하나님 앞에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리시면 죽을 자리에서도 살아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0여년전에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서, 10만명 가운데 한사람 살까 말까 한다는데 기적적으로 또 살아난 것입니다. 아직도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국 방방곡곡 안 다닌데 없고,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잘 낫든지 못 낫든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영생을 얻으며, 천국을 약속 받았습니다(5:24).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이나 재능, 우리의 물질과 몸으로 헌신하고 충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또한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천사같이 말을 잘 못하고, 바울 같은 능력이 없으며, 베드로처럼 수천명씩 전도를 못해도 우리 주변에서 라도 먼저는 내 가족부터, 내 이웃부터 전해야 합니다.

12:3절에 “...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했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최선을 다하므로 주님 앞에 잘했다 칭찬받고 빛난 면류관 받는 복된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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