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부활설교] 부활하신 예수

'코이네' 2014. 4. 14. 15:07

부활 설교, 고린도전서 15장, 부활하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고전15:51-57)
  
이 세상에는 여러종교가 있지만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다른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대속죄함과, 부활입니다. 다시 말하다면 기독교는 윤리도덕과 수양을 뛰어넘는 속죄와 부활의 종교인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 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음부로 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즉음을 보지않고 승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죽었던자가 다시 소생하는 일은 있었지만 다시 죽어야 할 존재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다가 영원히 죽지 않을 모습으로 살아난 경우는 예수님 뿐 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부활의 첫 열매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더욱더 분명히 부활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사건이며 , 이 사실을 믿는 것은 인간의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뻐하며 이 복음의 증인으로 모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죽음의 돌문을 연자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무덤 문을 열고 그 거대한 돌을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오클라호마의  유명한 흑인 목사 페리는 부활에 대한 좋은 예화를 말했씁니다. 

 
“한마리의 큰 뱀이 바닷속을 헤엄치면서 많은 물고기를 집어 삼켯습니다. 그러다가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이 물고기는 뱀의 뱃속에 들어가 너무 캄캄한지라 여기서 못살겠구나 하여 자기의 무기인 날카로운 지느러미로 그 뱀의 배를 찢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먼저 잡혀 먹힌 다른 물고기들도 그 뒤를 따라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뱀은 죽었습니다.” 이뱀은 사망입니다. 이 뱀이 오랫동안 사람들을 잡아먹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까지 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무덤을 열어 헤치고 나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죽은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오게 됩니다.  믿는자의 산 소망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무덤문은 열렸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자는 죽음을 두려워 하고 싫어 합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죽는 것이 얼마나 무서웠든지 죽을 死를 넣어서 인명을 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넉四자도 쓰기 싫어하여 병원이나 호텔도 4층을 쓰지않고  F층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이렇게 死자는 가장 싫어하고 꺼려하기 때문에 이 죽음을 막아 보려고 많은 사람이 시도해 보았지만 그러나 번번히 실패했을 뿐 전혀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어도 병을 다 치료하지 못하고 과학자들이 아무리 많은 것을 발명하고 우주까지 정복 했지만 죽음을 막는 것은 발명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은 죽지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래살려고 서양 사람들은  사슴의 눈물을 먹습니다. 왜냐하면 세익스피어의 희곡 “마음내키는대로”를 보면 사슴이 죽을때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을 받아 먹으면 만병이 통치되어 오래 산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말을 믿고 먹는답니다.
그러나 오래살 수는 있어도 늙는길 막을 수 없습니다 .  옛시인 정철은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손에 막대잡고 한 손에 가시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결국 사람들은 무덤 앞에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이 죽음의 돌문을 열어줄까 하며 울고 있습니다.   옛날에 좀처럼 울지 않기로 유명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세번 울은 적이 있답니다. 한번은 그가 페르샤 원정을 갔을때 페르샤 왕 고레스의 묘비를 보고 울었는데 “인생이 아무리 한때 부귀영화를 누려도 결국은 한개의 무덤밖에 남기는 것이 없으니 허무하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으며 , 인도의 인더스강가에서 인더스강만 건느가면 인도를 정복할 수 있는데 지친 부하들이 따라주지 않고 다시 돌아가야만 할 때 거기서 목놓아 울었엇고,  또 한번은 그가 부하들과 모래사장에서 씨름을 하다가 넘어졌는데 넘어진 그 자리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를 넘어뜨렸던 부하가 하도 무안해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부하에게 져서 원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모래 사장에 넘어진 자국을 보고 내가 지금은 이렇게 큰 나라를 가지고 부귀 권세를 누리지만 나도 죽으면 한 평의 땅속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냐고 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고통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큰 숙명의 과제 이었습니다. 아담 이후 인류의 종착점은 무덤 이었습니다. 무덤은 인간 최대의 절망이며 어둠이며 마지막 종착점이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류의 숙제인 사망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이 우리에게 가장 기쁜날 인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부활 하심으로 이 사망을 완전히 정복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딤후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 내신지라” 
 
사도 바울은 사망을 향해 이렇게 조롱하였습니다.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주님의 부활은 사망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큰 승리입니다.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 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기쁘고 줄거운 명절입니다. 
우리주님이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다시 부활 합니다. 그날이 가장 기뻐하는 날이 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줍니다.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능력중에 최고의 능력입니다. 

부활한 것을 믿고 생명을 포기한 사람만큼 숭고하게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마태복은 22장23절이하에보면 어느날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했는데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였습 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1) 부활신앙이 없으면 믿음이 무너집니다. 
 “(딤후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고전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 부활신앙이 없으면 산소망이 없어집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부활이 없는자의 삶은 소망이 없기에 방탕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서 부자들이 파티 할 때에 필히 관을 준비하고 그 관속에 인형을 시체대신 수의를 입혀서 눕혀 놓았다가 한창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누군가가 그 관뚜껑을 열어 제치고 그 속을 들여다 보게 하면서 “우리도 머지 않아 이렇게 관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인데 그러기 전에 더 잘 먹고 더 재미있게 놀다 죽읍시다.  잔뜩 쌓아만 놓고 먹지도 놀지도 못하다 죽으면 얼마나 원통한가?” 하고 외치면 모두 미친듯이 먹고 마시고 날뛴다고 합니다.  부활을 모르는자들의 춤과 노래와 향연은 미친듯이 날띄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자의 삶과 죽음은 다릅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였던 김활란 박사는 임종할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육체가 떠난다 해도 나를 죽은 사람 취급을 하여 장례식을 하지 말라 . 장례식 대신 세상에서 체험할 수 없었던 풍성한 길로 , 더욱 하려한 승리의 길을 가는 나를 환송해 주는 환송예배를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거기에 적합한 모든 승리와 영광과 생명의 노래로 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길을 웅장하고 신나는 음악회로 만들기 바란다. ” 
그래서 장례식을 ‘할렐루야’ 찬송으로 기쁘게 치렀다고 합니다. 참으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위인입니다. 
 
“(고전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15: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15: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15: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고전15: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말씀 하였습니다.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절망하여 다 도망 하였던 제자들이 모두 모여 증거하다가 순교 하였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죽은 것을 보았고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다 순교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거짓을 위하여 순교까지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일본 속담에 “풍문도 70일이면 끝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짓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소식은 2000년이 지나도 변함 없습니다. 제자들이 담대히 순교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만났기 때문이고 자기들도 죽게 되면 부활하신 주님처럼 다시 부활 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후 기독교인들은 박해속에서도 조금도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장렬하게 순교하는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게 되어 그 피값으로 기독교의 문화의 꽃을 피운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15: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요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될 때에만 산자의 행복을 누리며 살 수가 있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사는 자는 살아도 행복하고 죽어도 행복합니다.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부활할자로 잠들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한자는 썩지 않는몸 ,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 신령한 몸, 죽지않는 몸으로 다시 부활 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하신 예수님을 우리함께 축하합시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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