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자료

[맥추감사절] 이래도 감사할 수 있나요?

'코이네' 2016. 7. 3. 00:47

   이래도 감사할 수 있나요?

열왕기상17:17~24

 

 

오늘은 맥추감사절! 지난 6개월을 회고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본래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던 맥추절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 1년에 두 번의 감사절이 있었는데 전반기에는 맥추절, 후반기에는 수장절을 지킵니다. 그중 맥추절은 보리 농사를 짓고 추수한 후 한 해의 첫 수확을 한 후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올리는 절기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혹 우리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뭐 보리 농사 짓나? 우리는 필요없쟎아?" 그러나 그렇지 않죠. 당시 농경 시대에 지키던 맥추절의 기본 정신은 시대가 달라져도 계승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원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방편도 각각 다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오늘날까지 우리가 이땅에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신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우리가 평소 잊고 살아서 그렇지 하나씩 따져 보면 이 외에도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무궁무진합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이렇게 감사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다시금 감사하는 신앙을 회복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위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물질, 명예, 지위, 권세 등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인 줄 알고 그런 것들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행복을 위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그보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조건이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신학, 의학, 음악 박사)로 유명한 알버트 슈바이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환경이든지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늘 행복할 수 있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요함에도 처해 보았고,아프리카 정글의 열악한 환경에도 처해 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간의 행복이 환경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인간의 마음에 달려 있음을 터득한 것입니다. 바로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의 많은 말씀들 중에서도 행복의 열쇠 구절(key verse for happiness)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 일까요? 살전5:18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런데 문제는 이 구절의 문자 그대로 과연 범사에(=어떤 경우에라도, 항상)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 입니다. 고통이 찾아오고, 극한 시련이 닥쳐와도 그럴 수 있느냐? 이겁니다. 형통하고 편안할 때에야 가능하겠지만, 어렵고 힘들 때도 동일하게 감사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가능하니까 성경 말씀에서 명령하지 가능하지도 않은 것 폼인 잡아 보려고 괜히 해 본 소리겠습니까?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도 필요하고, 또 우리 마음을 붙드시고 움직일 수 있는 성령님의 도움도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잘 상고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행복한 인생의 비결을 배우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이 당시 북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거역할 때 참다 참다 결국은 3년 반 가뭄으로 징벌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엘리야에게는 이스라엘 땅에서 피신해서 이방인 지역인 시돈 땅에 가 있을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가난한 한 과부를 만납니다. 하나님은 그 여인을 통해 엘리야를 공궤하게 하신 것입니다. 8절~16절. 유명한 사건이죠.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물과 떡을 요청했을 때 그 여인은 마지막으로 외아들과 한번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먼저 자기에게 먹을 것을 만들어 오도록 요청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뭄이 끝나도록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 여인은 그 말을 믿고 순종합니다. 그러자 정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후 그 여인은 풍족한 생활을 누렸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엘리야 선지자를 자기 집에 유하게 하고 계속 공궤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습니다. 17절 "이 일 후에 ..."

그 여인의 외아들이 갑자기 중병을 앓다 죽고 만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지! 청천벽력보다 더한 일입니다. 여인에게 그 아들은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요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죽고 만 것입니다. 세상이 다 끝나고 인생도 끝장이 난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 ... 끊어진지라" 아들의 숨이 끊어짐과 동시에 여인의 인생 전부가 끊어진 것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 여인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일이죠. 여인은 그 슬픔과 절망감을 엘리야에게 토해 버립니다. 18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여인의 모습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렵니까?

"에이, 믿음 없는 사람 같으니 ... 기도하면 될 것이지 왜 그리 야단법석인가 ..."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믿음이 형편없구만 ..." 우리가 이런 식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럴수도 있겠죠. 그러나 혹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자기 일이라면 과연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여인은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을 정도입니다. 말하자면 신앙 생활을 하느라고 한 사람입니다. 차라리 죄짓고 허랑방탕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죄값으로 그렇거니 하고 아무 말도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경우 누구나 말문이 막하는 겁니다. 말을 한다면 그저 슬픔과 원망이 나오기 십상입니다.

예> 어느 목사 위암 발병 시 앞이 캄캄하더랍니다.(나중에 승리했지만)

 

이런 분들이 그럴진대 과연 우리가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극한 상황에서 정말 감사할 수 있겠는가? 솔직이 힘든 이야기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 당연히 슬퍼하고, 몸부림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 이게 정상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모습들이 고통이나 시련의 문제의 해결책이 될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땅을 치고 운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가? 원망한다고 잃어버린 재물이나 건강이 회복되는가?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분노한다고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있는가? 말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러므로 이런 경우 정답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말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해야 그런 경우에조차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 "생각함으로써 감사가 생겨난다"(Thinking precedes thanking.)

전7:14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본문에서 엘리야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잘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고난과 시련의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비결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여인에게서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마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여인 못지 않게 비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황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묵고 있는 집 주인의 외아들이 죽었으니 얼마나 민망합니까? 더욱이 그 여인이 엘리야에게 은근히 원망조로 이야기하니 얼마나 거북했겠습니까? 그 아이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계야 없지만 괜히 죄송하고 ... 그러나 같이 슬퍼하고 원망하고 변명한다고 되는 게 아님을 알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나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이의 시체를 안고 거처하는 다락방으로 올라 갑니다. 19절~22절.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그 시체 위에 자기 몸을 3번 펴서 엎드립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능력이 아이에게 임하도록 바라는 간절한 소원의 상징적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러자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자 기쁨과 감격이 넘쳤고, 더 나아가 그 여인에게서 신앙 고백의 탄성이 쏟아져 나옵니다. 24절. "내가 이제야 ..." 신앙이 아주 성숙해졌습니다. 과거에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그게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이유였습니다. 요9:3 "그(=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는 자)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말하자면 하나님도 여인도 손해본 게 아니고 유익을 얻은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선한 뜻이 있어서 고난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여인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민망했을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의연하게 대처하고 감사하면서 기도했을텐데 ...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잠잠히 기다리고 순종했을텐데 ... 그렇습니다. 미리 알았었더라면 이 여인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을 통해서 한꺼번에 그 과정을 읽어보니까 그렇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생각해 보자! 그러면 충분히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기도할 수 있으므로 감사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망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답답한 상황에 처해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사방 팔방 다 막혀 있어도 하늘은 열려 있듯이, 아무리 극한 시련이 나를 가로막아도 최소한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본문 같은 상황이 생긴다고 가정할 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럴 때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울고 불고 하는 것 뿐입니다. 발을 동동 구르는 것 외에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 효과도 없는 한탄만이 가능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취할 수있는 액션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다스리실 뿐 아니라 인생의 생사화복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행동(action)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어려운 일에 처할 때 막막할 때 그때조차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수 있으니까 ... 그 자체로 ...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러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놀라운 기적의 역사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약5:16~18 “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2]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감사하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천국가기까지 우리 인생길에 함께 해 주시며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① 고난을 통한 성화를 생각하고 : 성경의 많은 인물들을 보면 고난을 통해서 거룩한 인격과 위대한 인생으로 만들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도 고난을 당하면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후 그 여인은 아주 달라졌을 것입니다.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사48:10 고난의 풀무)

"하나님은 참나무를 기르려고 100년을 잡았지만 호박을 위해서는 6개월 잡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인생을 호박으로 만들지 않고 참나무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힘들지만 그대로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cf. 욥의 감사-욥23:10)

 

②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심을 생각하고 : 우리의 근시안적 안목으로는 고통이요 아픔인 것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복선을 깔아놓는 것일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맨처음에 의미없이 등장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절묘하게 들어맞는 경우를 봅니다. 마치 이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세밀하게 맞추어 가십니다. 문의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인생이 그렇죠.

예> 나치 수용소 체험기로 유명한 코리텐 붐 - 벼룩 주신 하나님께 감사!

수용소에 있을 때 열악한 환경에 벼룩까지 득실거려 불평. 그런데 어느날 간수가 중얼거리며 지나감. “벼룩 때문에 이 감방은 들여다 보기도 싫다.” 이렇게 해서 오히려 감사를 덜 받고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신앙으로 수용 생활 이겨냄.

우리 인생은 아직 만들어져 가는 과정 중입니다. 아직 판단하지 마십시오. 아직 실망하거나 원망할 때가 아닙니다. 아니 그럴 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생을 결국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드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할 뿐입니다.

 

③ 죽음 후에도 천국 영생의 축복을 주심을 생각하고 : 본문에서 여인의 아들을 살려주셨지만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장래 천국과 부활 영생입니다. 죽음을 초월한 축복! 예수 믿는 자에게 보장해 주시는 복!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순간에조차 감사할 수 잇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어려운 이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때조차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행복의 조건입니다. "이래도 감사할 수 있나요?" 이런 항변이 아니라 “이래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진정 행복한 인생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