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6:9]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 / 강기수 목사

'코이네' 2018. 3. 19. 22:17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

본문 : 히브리서 6:9-12  
설교자 : 강기수 목사 (‘97.6.1 한무리 주일 낮)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과거 지향적인 사고는 현실과 미래의 도전들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없다는 교훈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사실 “왕년에는 내가 어떠했는데 지금은…” 운운하며 과거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만족한 상태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최근 ‘한겨레 신문’과 ‘내일 신문’의 5월의 기사 중에는 “박정희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박정희의 향수” 등의 이름으로 우리 사회 저변에 흐르고 있는 일명 “박정희 신드롬”이란 기사들을 게재하였습니다. 내용인즉 비록 민주발전의 후퇴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가 좋았다”라는 표현들이었으며, 심지어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간”에 대한 설문조사(고려대 180명)에서 3위가 박정희 전대통령이었다는 가슴 아픈 내용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경제의 침체와 정치의 부패에 따른 국민들의 반발 심리가 과거에의 향수로 나타난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관점에 따라 여러 각도에서 당시의 역사를 재평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의 모순됨을 그리워하는 국민의 정신 건강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부의 축적과 출세를 위해선 윤리와 도덕은 뒷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회 의식 구조의 반영이라는 측면입니다. 한 나라와 그 시대의 소망은 구성원의 가치관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런면에서 과거 우리 민족은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와 출세를 위해서 열정적인 투자는 하였지만, 참다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을 아름답게 그려보는 비젼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설령 큰 포부가 있었다 하더라도 모두 다 가시적인 것들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보이는 것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단순히 드러난 명함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삶이 만약에 이생 뿐이라면 기독교인처럼 불쌍한 자가 없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다시말해서 성도란 미래의 소망을 양식으로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춘향이가 이몽룡과의 재회를 꿈꾸지 않았더라면 어찌 신의와 정조를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위기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본문 히6:1-12은 죄악을 이기고 축복의 기업을 받는 비결은 무엇인가를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너희 각 사람이 도의 초보를 버려라.(1-3)


    둘째로 배교자의 길(타락과 죄악)로 돌아 가지 말라.(4-8)


    셋째로 영적 성장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 하라.(11-12)


    넷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11)


    다섯째로 인내로 약속의 기업을 받는 자 되라.(12)


   

이상과 같이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들이 배교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구원을 소유한 자들임을 확신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역시 과거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 속에서도 아브라함(13-15)처럼 우리를 계속 축복하실 것임을 교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 역시 우리에게 풍요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10:10) 그러나 그러한 은총은 과거를 바라보는 자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미래의 소망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만 풍성히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 유명한 ‘디모스테네스’는 본래 말더듬이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시끄러운 바닷가에서 자갈을 입에 물고 날마다 발음 훈련을 함으로써 마침내 아테네 최고의 웅변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분명 오늘은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행복을 소망가운데 바라보심으로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