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11:32] 담대한 믿음의 길 / 이강웅목사

'코이네' 2018. 1. 14. 00:04

담대한 믿음의 길
본문: 히브리서 11:32-40

설교: 이강웅 목사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

 

 

서론: 우리 기독교 신앙을 소위 이적과 기적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성경을 살펴보면 기적과 이적의 기사가 참 많이 등장합니다. 우선 구약을 살펴보면 홍해가 갈라진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다,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온다, 이런 기적이 계속하여 등장합니다. 신약에서도 예수께서 각종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나며,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물위를 걷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납니다. 이렇게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시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적과 기적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것만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과 이적만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유일한 통치 방식이 아닙니다.

 

안이숙 사모가 쓴 책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아주 인상적인 대목이 나옵니다.

일본제국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에서 독립운동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가장 먼저 기독교 조직을 와해시키기로 작정합니다. 많은 교회 목사들과 지도자들을 검거하여 유치장에 가두고 무섭게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열렬히 믿던 신도들은 박해를 피해서 이리저리 흩어져 숨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무슨 계획인지 알 수 없으나 구속했던 목사들과 지도자들을 일시적으로 풀어 줍니다. 숨어 있던 신도들이 풀려난 분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옥중 고난을 듣습니다. 안이숙 씨도 깊은 밤에 고문을 아주 심하게 당했다는 이유택 목사님댁을 찾아갔습니다. 깊은 밤중에 모여든 신도들도 신앙을 위해서 구속될 각오를 했던 사람들이라 이목사님에게 여러 가지 고문 당하던 일과 감옥생활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얼굴이 창백한 이유택 목사님은 어찌나 지독한 고문을 당했던지 풀려나온 것 자체를 별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 중에서 모든 신자들이 가장 듣고자 하는 질문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심한 고문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던가요?” 모두 긴장과 고요 속에서 숨을 죽이며 답변을 기다립니다.

이유택목사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한참을 머리 숙여 깊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낙심마십시오. 아무런 이적도 내게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믿기를 내가 그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큰 권능을 나타내어 고문을 아프지 않게 이겨내도록 해주실 줄로 믿었으나 그런 것이 아니드만요. 얼마나 아프고 견디기 어려웠던지 죽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저주스러웠어요. 나는 ‘오! 주여 속히 내 영혼을 거두어 올려주시어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하고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겁이 나는지 알 수 없었어요. 참으로 힘들었어요.”

이 말을 듣자 안이숙씨는 마치 보자기로 확 씌우는 것처럼 눈 앞에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낙심하여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듣고 본 바를 전하자 어머니는 참으로 의외라는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서 안이숙씨를 타이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사람의 모든 경험을 하신 후에야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사람으로 십자가를 지셨으니 그 얼마나 아프셨고 어려웠을까. 우리도 부활하기 전에는 신이 될 수 없으니 사람으로서의 고난은 그대로 다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픈 것을 견디는 것이 희생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비록 신학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아주 정확히 이해하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적과 기적을 통해서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자연계의 질서와 법칙에 따라서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를 사용하여 살아가는 일상생활 또한 신앙의 영역에 속합니다. 자연계 법칙과 질서,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인격적인 활동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또 다른 중요한 통치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꼭 이적과 기적이 일어나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고,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기적적인 현상을 체험하거나 목격하지 않아도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깨달으며 감사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여도 거쳐가야 할 것을 다 거쳐가야 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기도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런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의 울타리를 벗어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바로 이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 안에서 여전히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신앙의 영웅들이 등장하지만 그들 모두가 기적적인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으로 크게 승리하거나 구출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박해와 시련을 겪으면서 끝까지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기적적인 구출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고 사명을 마쳤습니다.

 

신년을 시작하면서 현재 여러분의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어떤 장애물이 기다릴 것 같습니까? 어떤 열악한 조건입니까? 우리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결코 장미꽃이 뿌려진 길을 갔던 것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어쩌면 우리 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련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도 패배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믿음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매우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도전적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인내합니다. 시련을 적극적으로 감내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담대한 믿음이 이들을 통해서 어떤 삶을 살게 하였는지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1. 믿음은 문제를 극복하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신앙의 용사들에게도 우리처럼 어려운 난관이 가로막고 있었고, 뛰어넘기 어려운 장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무력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패배주의와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있는 장애들, 문제들, 도전들을 다 극복하고 승리했습니다.
(히 11:33-35절 상)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는 이방 왕에게 압제를 당하던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였지만 믿음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믿음으로 때려 눕혔습니다.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의를 행하기도 하며” 엘리야는 악한 유대 왕 아합 앞에 나아가 우상숭배의 죄를 책망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의를 행했던 것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받기도 하며” 여호수아는 “네가 밟는 모든 땅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그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모함에 빠져 사자의 굴에 던지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가 사자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다니엘 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믿음이 그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불 속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금산상 앞에 절하지 않으면 불구덩이 속에 집어던지겠다는 느브갓네살 왕의 위협 앞에서 그들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니엘 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이 믿음의 고백이 불의 세력을 꺾은 것입니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다윗은 사울왕의 칼날을 피해 목숨을 보존했습니다. 때로는 다윗이 숨어 있는 그 굴속에 사울왕도 쉬러 들어올 정도로 위태위태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생명이 보존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방패요, 나의 피난처”라고 고백한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인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의뢰하고 전장에 나아가 승리했습니다. 믿음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다시 살려 냈습니다.

모두 믿음이 가져온 승리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수많은 증거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 도처에서 기적을 행하게 하시며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특출한 존재여서 승리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특이한 재능이나 은사를 가지고 출생한 것 아닙니다. 그들 또한 우리처럼 아주 평범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기드온이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때의 모습은 용사가 아니라 미디안의 군대를 피하여 포도주 틀 속에 숨어들어가 몰래 밀을 타작하던 겁쟁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 용사여’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연약하고 소심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큰 용사가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핍박할 때 나귀 턱뼈로 3,000명을 때려누인 삼손은 지극히 평범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입다라는 사사는 어머니가 기생이자 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복형제들에 의해서 아버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이새의 말째로 태어나 가족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왕을 이어 왕위에 오를 인물을 살피러 이새의 집에 왔을 때 그는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왕이 될 인물로 생각조차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의 출신배경을 살펴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가운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조건들을 다 뛰어넘어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위대한 삶을 살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믿음은 담대한 믿음이었습니다.

 

 


 

 

2. 믿음은 핍박을 감당하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잘 믿기만 하면 언제나 성공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무서운 시련 가운데서 위대한 승리를 거둔 신앙의 용사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본문 25절 후반절 부터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뭇 숙연한 느낌마저 듭니다.

(히 11:35 하)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언제나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문을 당하는 가운데 구차히 살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더 좋은 부활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고 죽은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그들은 또한 희롱 당하고, 채찍질 당하고, 결박당하고, 옥에 갇힘을 당했습니다. 선지자 미가야가, 예레미야가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다가 위정자들이 비위에 거스린다고 그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옥에 집어넣었습니다. 37절에 보면 돌로 침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2번이나 돌로 침을 당했습니다. 또 톱으로 켬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므낫세라는 악한 왕이 이사야를 그렇게 죽였다고 합니다. 또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의 칼에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더러는 박해를 피하여 양과 염소의 가죽을 쓰고 피해 다니며 광야를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핍박과 환란에서 건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이 본문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듣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직장에서 승진합니다, 사업이 번창할 것입니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이나 직장에 합격할 겁니다, 병 고침을 받을 겁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이런 설교를 많이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간증도 축복을 받았다고 간증합니다. 감사기도의 제목도 전부 이런 내용으로 올라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승진에서 누락되어서, 병이 회복되지 않고 더 중해지고 죽음에 가까워져서, 사업이 안 되어 집을 내놓고 아파트로 이사해서 이걸 가지고 감사헌금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믿음을 세상적인 복에만 연결시키는 것일까요? 세상적으로 잘된다는,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얘기를 해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성경 내용을 온전하게 읽지 않고 그저 자기 입맛에 좋은 것만 골라서 읽고, 설교하는 겁니까? 물론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얘기를 한다는 것은 설교자가 피하고 싶은 유혹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의식하면 축복 설교로 일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설교는 성경 어느 본문을 택해서 설교해도 결국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진리의 절반만 전하는 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왜곡시키는 것이고 믿음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복에 대해서 분명히 약속하지만 동시에 핍박에 대해서도 계속 경고합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사람들은 세상축복 보다도 핍박이 오히려 믿음의 증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거듭 말합니다.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초대 교회의 가장 큰 위협은 율법주의로 왔습니다.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을 행위로 구원 받는 율법주의로 바꾸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율법주의자들과 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종교적이기는 하지만 복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가장 중대한 위협은 무엇일까요? 기복주의입니다. 왜 그것이 중대한 위협일까요?
그것은 매우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복음을 변질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기복적 물신주의, 이것이 지금 교회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 축복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으로 향하는 우리 마음을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우리에게 세상을 의지하고, 집착하는데서 마음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복주의 신앙은 세상 축복을 약속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욕망을 은근히 부추겨서 오히려 우리 마음을 세상에 갖다 붙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마치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을 빌어서 내 욕심과 내 정욕을 채우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왕국과 상관이 없는 세상 왕국을 세우려는 시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꼭 고난을 당하는 것만이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잘못되었습니다. 단지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히브리서 11장 전반부처럼 성공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고, 또 반면에 11장 후반부처럼 실패한 인생처럼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생활이란 성공이든지 실패든지 그걸 떠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성공과 실패로부터 자유하고, 설령 세상적인 관점에서 성공한 인생일지라도 교만하지 않으며, 실패한 인생일지라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장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에 대한 소신 때문에 승진이 안 되거나 실직할 수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장사하다보니 쉽게 돈을 모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관행을 거부하다가 왕따를 당하고, 불이익을 감수해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한 병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은 후, 꼭 살려 달라며 하나님께 매달리기 보다는 때가 되었음을 알고, 죽음을 준비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증거하는 분도 계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결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세상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승리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록 세상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여전히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도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하고 큰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죽을병이 들어서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고서 극한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이혼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칠 때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얼굴에 평강의 빛이 발하고 있습니다. 그 때 세상은 비로소 믿음의 실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환란과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이대로 망하지 않고 여전히 의연하게 살아가는 그 무엇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그래서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다갔지만 그들 또한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 반열에 당당하게 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38절에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런 사람에게는 세상이 적합한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이 세상은 이런 사람에 비하면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존재가 너무 가치 있는 사람들이어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어요. 세상은 이들의 참된 가치를 보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아 보지 못해요. 결국 이들은 이 세상이 아닌, 영광 가운데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핍박과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 천국을 고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였기에 기꺼이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성공적이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견디어 내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2017년을 시작하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담대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비굴하지 않게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크게 승리하셨습니까? 교만하지 않도록 겸손하십시다. 실패하였습니까?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라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구속주 하나님,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몬트레이 한인제일장로교회 이강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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