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계시록

[계3:1]사데교회, 언제나 살아 있는 신앙

'코이네' 2017. 2. 26. 00:23

 [일곱교회 시리즈5] 언제나 살아 있는 신앙 (계 3:1-6)    

 

 

언제나 살아 있는 신앙

(요한계시록 3:1-6)

설교: 이동원 목사

 

 

 

찰스 알렌(Charles Allen) 박사는 최근 교회를 상대로 다각도의 신앙 생활을 조사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통계로 보고해줍니다. 교인 중 20%는 거의 주일예배에 출석하고 있지 않으며, 25%의 기독교 신자는 거의 기도를 하지 않으며, 35%의 기독교인들은 가정에서 성경을 읽는 일이 거의 없으며, 40%의 교인들은 일정한 헌금을 결정하지 않고 교회 생활을 하고 있으며, 75%의 교인들은 교회에서 어떤 책임도 지고 있지 않으며, 85%의 교인들은 불신자를 한명도 교회로 인도해 본 일이 없다고 한다.그런데 100%의 교인들이 그들은 천국에 가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참조;이것은 알렌박사의 연구라기 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바나리서치그룹'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미국의 대설교가인 유진 브라이스(Eugene Brice) 박사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고난주간 저녁 예배를 마치고 사택으로 돌아갔더니 여덟 살 난 아들이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 수난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유진 브라이스 목사님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는 영화였습니다. 해마다 수난절에 방영되는 똑같은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기는 막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신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목회 사역 20년간 밤낮 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심코 아들 곁에 앉아있던 그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TV 영화로 보고 있는 여덟살 난 아들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순간에 마음에 깊은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신앙의 진면목을 들여다보게 된 것입니다. 언제 자기의 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이 고였었는가? 까마득한 이야기였습니다. 대설교가인 유진 브라이스 목사는 자기의 메마른 심령상태가 습관화되고 형식화되어 죽어버린 신앙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린 아들은 비록 TV 영화이지만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살아있는 신앙을 보여주는데, 아버지는 목사로서 교회 강단에서 십자가를 설교하고 돌아오면서도 전혀 감동이나 감격이 없는 죽은 신앙인이었음을 고백해주는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당신의 신앙상태는 어떠십니까?
당신의 신앙은 죽어있습니까, 살아있습니까?
몇 해 전에 어느 중국교포 신자가 우리 한국교회를 방문하고 다시 돌아가면서 이런 도전적이며 의미깊은 말을 남겨놓았습니다.지금 중국의 공산정권 밑에서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살아계신 예수를 믿고 있는 반면에, 한국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귀족적인 양반 예수를 믿고 있다는 차이점을 발견하고 돌아가노라.

이것이 곧 오늘 요한계시록 3장을 통해서 주시는 사데교회의 교훈입니다.


사데교회의 모습은 두 개의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사데교회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기 모습과,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보시는 모습입니다.
즉 사데교회 자신들이 볼 때는 살아 있는 신앙 같으나, 주님이 보실 때는 죽은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으나 속으로는 죽은 신앙일 수 있음을 깨우쳐주는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처럼 허수아비 신앙은 아닌지요! 허수아비는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침에 다시 한번 영혼의 새 봄을 맞이하는 새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형식주의에서 영혼이 살아 있는 신앙으로 살자

 

그 당시 사데교회는 부유하고 사치스런 도시에 있다보니 안전하고 별 핍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말로만 믿는 형식적인 신앙으로 전락하였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명목상의 신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자기가 믿음이 없는 것조차 모르는 유명무실증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교인을 산송장의 신앙이라고 지적하십니다(1절).
여기 “죽은 자”라는 표현은 영적 무기력과 무능력을 말합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을 뿐이라는 표현은, 사람들한테는 크리스챤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 신앙인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교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나와 예배는 드리지만 형식과 의식으로 그치기가 쉽고, 그 어떤 가슴의감동이나 기쁨도 없이 그냥 메너리즘에 빠져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도 있고, 직책도 맡아서 바쁘게 활동은 하는데 영적 생명이나 생기가 전혀 없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늦게 예수님을 믿게 되신 아버지가 지방에 내려가 사는 세 아들을 불러 주일마다 교회에 나갈 것을 당부했습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지난 후 아버지는 세 아들을 다시 불러 모아서 교회 나간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물었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삶이 보다 경건해졌고 사업도 잘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교회나간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세째 아들은 보이질 않고 대신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요즘 마을의 장애자들과 노인들을 돌보느라고 도저히 올 수가 없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 중 교회에 가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아들은 세째 아들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그렇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당신의 신앙은 살아 있습니까, 죽어 있습니까?
당신은 교회다닌지 오래 되었는데도 그 어떤 활력이나 생기가 없이 안일하게 보내든지, 아니면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였던 Paul Tournier는 “신앙의 가장 큰 장애물은 겉모양의 신앙이다”라고 지적해줍니다.
외형, 의식, 종교, 관습, 전통, 예배 등은 있으나 실제의 내용과 본질이 결핍된 교회 생활만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Albert Schweitzer 박사는 현대 크리스찬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아프리카에는 물없는 강이 많다. 모래 언덕 사이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초라하고 비참하다. 오늘날 크리스찬들도 물없는 강처럼 억지로 흘러가는 신앙생활, 메마른 정신, 형식과 전통만 겨우 유지하는 교회를 많이 본다.”


그렇습니다. 잠든 교회, 잠든 교인들이 꽤 많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2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각성시켜주십니다.
『너는 죽어가고 있는 신앙에서 어서 깨어나라. 하나님이 보실 때 너의 신앙은 속이 비어 있는 것이니라』
여기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는 말은 “속이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원래는 비어 있는 조개 껍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시골에서 조개를 잡을 때 어떤 것들은 속이 비어 있는 것들이 있어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아침 우리 모두 속이 비어 있는 형식적인 신앙에서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 그대로 자기 스스로는 살았다고 말하나 죽은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의 간증처럼, 죽은 사람 같으나 살아 있는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6:9).
저는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새롭게 살아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목련꽃이 살아나고, 개나리가 만개하며, 진달래가 활짝 피어나듯이 새롭게 살아나기를 소원합니다.


2. 과거 체험에서 오늘도 살아 있는 영성으로 살자

 

사데교회는 일찍이 신앙생활을 매우 좋게 출발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상기시켜 주십니다(3절).

Received Remember Repent
『그러므로 네가 무엇을 받았으며, 또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사데교회는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성령충만함을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감격스럽게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좋았던 영성이 지금은 다 식어져버렸고 사라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었는지, 그때 받은 은혜와 성령충만함을 다시 기억해낼 필요가 있습니다.그때가 좋았었다면 지금은 더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신앙체험과 은혜체험을 추억으로만 여겨서는 안됩니다.
다시 살려내야 합니다.
21 세기는 새로운 영성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영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언제 무슨 불행한 일이 일어날지 정말 불안합니다(3절).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혁명은 내적 혁명입니다. 우리 속사람의 변화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과거 체험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유대인 신학자 Vance Havner는 인간의 영적 퇴보를 네 단계로 잘 규명해줍니다.
Man ⇒ Movement ⇒ Machine ⇒ Monument
처음에는 은혜받은 사람이 되다가, 나중에는 운동과 활동에 빠지기 쉽고, 기계적이 되다가 과거를 기념하는 단계로 전락될 수 있음을 주지시켜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멸된 내면의 불꽃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에베소교회처럼 어디서 떨어진 것을 기억하고, 처음 체험했던 그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2:5).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발작적 신앙이 아니라, 발전적 신앙으로 계속 전진해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1절)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지상의 모든 교회,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충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행 5:32. 10:38).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리면 어떨까요?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영혼에! 영감을 불어넣어 하늘의 불로써 밝게 하소서.
당신은 당신의 일곱배의 선물을 나눠주시며, 기름부으시는 영이시옵니다.
위로부터 오는 당신의 복된 임재는 위로며 생명이요 사랑의 불이옵니다.
영원한 빛으로써 우리의 어두워진 시력의 둔함을 밝게 하옵소서!
생명의 임김이여, 오셔서 저희들을 휩쓸어 지나가소서
생명과 능력으로 당신의 교회를 부흥케 하소서;
오 생명의 입김이여, 오셔서 저희들을 깨끗하게 새롭게 하셔서
당신의 교회로 이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적합하게 하소서”

“살아계신 성령님 날 붙드소서 살아계신 성령님 날 살피소서 채우소서 XZ. 성령 하나님 새롭게 하소서”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살아 있는 간증으로 살자

 

역사 이래로 시대가 아무리 어두워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경건한 신자들은 어느 때나 존재하여오고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는 칠천명이나 되는 경건한 성도들이 이스라엘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왕상 19:18).
오늘 예수님께서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경건한 남아 있는 자들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십니다(4절).
여기『나와 함께 다닌다』는 말은 페르시아 제국의 관습에서 유래된 표현입니다.
“왕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 신하들은 왕과 함께 궁전 뜰을 거니는 특전을 누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 있는 간증을 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의 뜻은 심플하면서도 힘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섞여살지 말고, 그대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생생한 간증을 하는 삶을 사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합당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에녹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창 5:22-24). 직장생활의 간증, 사업의 간증, 일상 간증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신앙생활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간증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메시지는 이름으로 시작하여(1절), 이름으로 끝납니다(5절).
살아 있는 신앙으로 간증을 통해 세상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높이면 하나님께서도 그 이름을 천하만국 앞에서 높여주시리라는 가슴벅찬 약속입니다(마 10:32. 눅 12:8).
이제 우리는 언제나 살아 있는 신앙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