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4:15]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코이네' 2024. 2. 16. 20:39

은혜의 보좌 앞으로 

본문 : 히 4:15~16 

 

 

복음의 기쁨을 누리던 사람들이 핍박이나 유혹으로 인해서 하나 둘씩 복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순간의 이익을 위해 영원한 안식을 잃는 것이기에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배교의 위험이 있는 성도들을 보면서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난 시간까지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필요했듯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아야 할 백성들이 점차적으로 말씀에서 떨어져 나가므로 그들에게서 안식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동일한 일들이 신약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 종교적 핍박으로 인해서 배교하는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들의 배교는 참된 안식을 떠나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복음을 바로 심어주기 위해서는 본문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조명하면서 참된 안식을 다시 한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은 순종을 통해서 주어졌고, 가나안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안식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킵니다. 말씀 속에서 안식이 주어졌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으로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본체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성육신 하신 말씀으로서 그 사역을 통해서 안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친히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일반 제사장이 아니라 큰 대제사장이되셨습니다. 사랑하는 그의 백성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친히 큰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없어진 안식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친히 큰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히브리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것들을 기록해 놓았지만 이제부터는 히브리서의 본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본문은 그 중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특이할만한 사실을 대제사장 앞에 이란 말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강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최고의 존영과 탁월함이 있음을 충분히 강조하기 위해서 붙여진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대제사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분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인간 제사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대제사장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큰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이며, 진정한 안식을 얻기 위해서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향하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1. 예수님만이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이라 할 때에 히2:17에 기록된 충성된 대제사장과 비교가 됩니다. 이 말은 멜기세댁에게도 쓰지 않았던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멜기세댁 보다도 더 탁월하신 분이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승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대제사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분이시기에 인간 제사장과 구분하기 위해서 큰 대제사장이라고 호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 제사장은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대화가 있었던 시대는 제사장이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로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 후로 하나님과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관계를 연결해 줄 중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장 제도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제도 속에서 제사장을 통해 인간이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 큰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대제사장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첫째는 아론의 자손이어야 합니다(29:9). 둘째는 거룩해야 합니다(29:44). 왜냐하면 그의 사역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물로 씻기우고 거룩한 옷을 입고 기름부음을 입어야 했습니다(29:4-7).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자는 거룩해야 하고, 그 사역을 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셋째는 육체에 흠이 없어야 합니다(21:17-23). 넷째는 제사장의 譜系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야 합니다(2:62). 제사장의 계보에 속한 자들은 레위인들입니다. 그들 중에서 대제사장을 선출합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은 주로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사역을 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일을 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하는 것이라면 제사장은 사람의 일을 하님께 아뢰는 일을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양편 사이에 서서 중보의 역할을 합니다(16:43-48). 중보의 역할을 통해서 양편을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로 예물과 속죄제를 드리는 일입니다(5:1, 대상16:39-40)). 그러나 대제사장은 자신도 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사하는 제사도 드려야 합니다(16:1-6, 16:33-34). 둘째로 백성을 축복합니다(6:22-27). 셋째로 왕에게 기름을 붓습니다(왕상1:34). 넷째로 재판을 관장합니다(26:3,57-62). 다섯째로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칩니다(10:11). 여섯째로 성소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회막의 등잔불이 끊이지 않도록 정리를 합니다(18:1-5). 일곱째로 첫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일을 합니다(9:6). 이 외에도 여러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의 사역도 죄인인 인간으로서는 온전히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사역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격의 존귀함에 있어서나, 그의 본성의 순결성에 있어서나, 반열의 탁월성에 있어서나(멜기세댁보다), 엄숙하게 세워졌다는 면에서나, 희생의 탁월함에 있어서나, 일하시는 완전함에 있어서나, 직무의 영구성에 있어서나 어느 면에 있어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4:14).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는 인간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와는 달리 당신이 직접 몸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의 일터가 지상이었던 것에 비해서 신약의 대제사장의 일터는 하늘 하나님의 보좌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계속 대제사장의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1:3, 8:34). 영원히 죽지 않는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7:20-26). 이 사역은 인간으로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큰 대제사장으로 불리워지기에 손색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2. 예수님은 공감대를 형성하셨습니다.

 

동병상린이란 말이 있습니다. 직접 몸으로 체험한 사람만이 그 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가끔 상담을 하면서 느끼는 문제점 중의 하나는 당신은 이런 체험이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의 심정을 잘 모를 것입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오해의 소지를 받지 않아도 되셨습니다.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하시기 위해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큰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은 인간과 일체가 되셨습니다. 일체가 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30년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제도 있었습니다. 고통도 있었습니다. 배고픔도 있었습니다. 피곤함도 있었습니다. 눈물도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일체가 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여 맛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인간의 모든 형편을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공감대 형성을 위해서 인간의 연약함을 맛보셨습니다. 무엇이 인간의 연약함입니까? 힘과 결심이 약하여 늘 넘어지기 잘하는 것입니다. 조석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환경에 쉽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의 마음과 배부를 때의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희로애락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든 것을 맛보셨습니다. 한 번 해보기 위해서 경험하신 것이 아니라 100퍼센트 인간의 모습으로 모든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돈이 있으면서 배고픈 것과 돈이 없으면서 배고픈 것은 배고픔의 정도가 다르듯이 하나님으로서 사람이신 예수님은 인간뿐인 인간의 고통과 다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부질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셨기에 인간과 그 모든 고통을 다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무지가 무엇인지, 가난이 무엇인지, 질병이 무엇인지, 약함이 무엇인지, 미움이 무엇인지, 부패가 무엇인지, 영혼이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압도적인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또한 신적 은총이 태양 빛으로 새롭게 되는 것과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시험이 오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함으로 시험을 받게 됩니다. 둘째는 죄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성 때문에 시험을 받게 됩니다. 셋째는 욕심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심어주는 마음입니다. 하와의 욕심은 금단의 열매를 먹게 했고 그 결과는 에덴에서 쫓겨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넷째는 의지의 결여에서 나오는 방종입니다. 인간은 죄에 의해서 죄를 지으며 습관적인 죄에 의해서 실제적인 죄로, 내재하는 죄에 의해서 외부로 드러나는 죄를 짓는 시험을 받습니다. 또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죄에 동참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 때문에 시험을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기 전에도 죄가 없었습니다. 시험을 받는 중에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4:1-11). 인간 생활의 악조건에서도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벧전2:22, 요일3:5). 예수님은 어떤 내부적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도 죄에 동참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본성이 거룩할 뿐 아니라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았기에 우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이기는 방법도 아십니다. 베드로의 비통한 통곡의 눈물을 씻어줄 수가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로 고통을 당하는 바울에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죄인의 처방이 아닌 완전한 의인의 처방을 해주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보좌에 나가야 합니다.

 

큰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이 베풀어 놓으신 잔치에 참여하기만 하면 됩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는 시은소 혹은 속죄소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곳은 법궤의 덮개를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가서 은혜의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가지고 나왔듯이 예수님은 인류의 큰대제사장으로서 영적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은혜의 보좌로부터 축복을 얻어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축복의 장소로 나가야 합니다.

 

긍휼을 받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에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자격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절, 선하심, 인자하심, 긍휼하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긍휼은 우리가 곤경과 궁핍에 빠져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자하심에 의해서 은혜로운 도움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동정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 앞에 나가는자, 엎드리는 자가 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그는 자신의 고통과 수고와 유혹받는 제자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의 모든 질고를 지시고 그들을 향하여 깊은 연민의 정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실 뿐 아니라 우리가 신앙을 굳게 잡을 수 있도록 실제적 도움을 주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하심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구하는 심정으로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에 나가야 합니다. 긍휼하심을 얻는 것이 수동적인 행동이라면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보좌로 나가는 것은 능동적 행동입니다. 돕는 은혜를 구하는 것은 겸비하고 열심있게 믿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가는 자가 주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이끄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필요한 때, 필요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주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나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주어지는 시작과 목적이 알맞게 응답해 주십니다. 환난의 때, 핍박의 때, 유혹의 때, 영적 기갈의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축복의 때, 어느 순간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는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 목마르고 갈급할 때 돕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로 나가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돕는 은혜를 받고 은혜의 보좌로 나가는 사람들은 이제는 더이상 부끄럽거나 누추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죄 용서함을 받은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완성해 놓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그 앞을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담대히 나가는 것은 자유롭게 나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내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율법적 속박이 아닙니다.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실 것이라는 확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 때에 이 자유가 이루어집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능력있는 믿음은 확신을 가진 믿음입니다. 나를 도와주실 것인가? 내 기도에 응답이 있을 것인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모든 불신을 씻어야 합니다.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누가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가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재자가 되시며, 대제사장이시며,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위해 대언기도를 하시는 분임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나갈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나가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소원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55:8,9). 확신으로 나가야 합니다(1:6). 정직과 솔직과 온전한 말을 통해서 믿는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얻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큰 대제사장이 되시므로 모든 안식을 완전히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약한 것을 친히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십니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은 가장 높은 영광 중에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의요 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감찰하시고 기도하시고 단단히 붙잡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힘내고 용기를 내야 합니다. 겁먹고 싫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양떼를 선한 목자로서 지키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담대히 나가므로 참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은혜의 보좌로 베풀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담대히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이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 분이 은혜의 보좌를 베푸십니다. 이제 우리는 큰 대제사장의 도움을 입어 하나님의 안식의 축복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담대히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