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4:12] 살아 있는 말씀 _ 이중표 목사

'코이네' 2022. 3. 14. 00:06

 

살아 있는 말씀

히브리서 412~13

이 중 표 목 사 (한신 목회개발원 원장)

 

 

 

하나님의 은혜로 제8회 전국 목회자 세미나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드리며 여기 모인 동역자들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 주께서 주시는 은혜가 더하고 또한 시대적 사명이 큰 것을 실감합니다. 지금 이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서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개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살아 있는 말씀뿐입니다.

이런 시대적 요청에 따라 금번 주제를 교회발전을 위한 성서개발로 정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큰 은혜를 주실 것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가졌던 모든 주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회, 설교, 영성, 인격, 선교, 지도력, 의식개발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 없이는 교회가 없고, 성경이 없이는 목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입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성경을 손에 들고 사는 사람입니다. 목사에게 유일한 재산이요, 보화요, 능력이 되는 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복음이 성경에 있고, 우리의 기도도 성경에 근거하고 있으며, 설교도 성경의 영감을 통해서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서개발이란 주제의 내용은 성경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받아서 자신이 변화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변화, 이 민족 역사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목표를 이루려는 데 있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 공부

 

목회자 가운데 성경을 백 독 하셨다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훌륭한 분들입니다. 자랑할 만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백 독 하고도 그 성경 속에서 생명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다독하는 연습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가지고 유명한 신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연구의 신학일 뿐이지 그 신학을 통해서 큰 사건을 일으키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곧 생명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으로 설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성경의 공부와 신학 연구와 독서의 전부가 나에게 생명적 사건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성경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주의 종들이 더러 있어서 목사님들이 거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론이 성경의 어디에 근거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상한 성경연구를 해서 특수한 소리를 하는 것이 교인들에게 굉장한 호기심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다가 이단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기도하다가 신비주의에 빠지고, 성경에서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다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서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칼빈이 말한 대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경이 가라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서라는 데에서 서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보다 더 가는 것은 이단입니다. 성경보다 인간의 이성이 앞서가면 자유주의가 되는 것이고, 성경보다 자기 감정이 앞서면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이고, 성경보다 자기의 생각이 앞서서 문자주의에 빠질 때 그들은 타락하고 잘못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다고 하는 말씀에 대하여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성육신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다”(1:1). 이 말씀에 대하여 오리게네스라든지 당시의 초대교회 교부들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이 성경적 복음이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내리든지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성경 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존 오웬이라는 성경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그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귀한 성경의 말씀들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임하기 위해서는 이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살아 계신 예수를 증거하는 말씀

 

요한복음 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856절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했고, 요한복음 546절에는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2245절에 보면 다윗이 예수님에 대하여 주로 칭하였다고 했습니다. 성경 전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등 위대한 선진들이 결과적으로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매우 명백하게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 한다.”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성경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성경이 어느 정도 유익은 될지 모르나 살아 있는 말씀은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솔로몬의 잠언에서 지혜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도 그런 지혜를 말했습니다. 석가도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시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는 다른 데서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성경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행위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앙고백 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들어 있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친히 말씀하시기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하시고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는 것 같이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만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무엇을 얻어야 됩니까?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유대인들도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거기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보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문자주의에 빠졌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오늘날 많은 주의 종들 중에 성경 읽는 것이 어떤 마술적인 효과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성경 읽는 일에 미신적인 사고를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시에 구약성경의 사소한 문자부분까지 암송했고, 세심한 부분까지 글자 수를 세었습니다. 저들은 성경 지식에 대한 축적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성경관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대신에 성경 자체에서 생명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저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 그것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줄 믿습니다.

 

살아 있는 예수를 제쳐놓은 신학

 

성경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글자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속에 계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지난날 한국 교회의 신학자들이 성서 문자 해석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신학이다, 보수다 하면서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는 것을 우리는 소홀히 하고 문자만 가지고 싸웠습니다. 그때 한국 교회가 분열되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오늘 우리는 그런 제자가 되지 말아야 됩니다. 문자를 가지고 싸우는 제자가 되어서 그것 때문에 남을 혐오하거나 비판하거나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날 문자주의로 보수의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가상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의 문자 때문에 싸우던 두 분이 천국에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분을 불러놓고 그대들이 정통이다, 보수다, 신 신학이다 하면서 싸웠다는데 사실인가?” “그렇사옵니다.” “무엇 때문에 싸웠는가?” “신학 때문에 싸웠습니다.” “신학은 누가 가르쳤는가? 그 신학은 어디에서 배웠는가?” “미국 신학교에서 교수에게 배웠습니다.” “내가 싸우라고 가르쳤는가?” “주님에게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 신학을 잘못 배웠구먼. 자네들이 신학교를 세우고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는데 그 제자가 예수 제자인가, 자네 제자인가? 그대들이 신학교에서 가르친 것에 대하여 지금 어떻게 생각하는가?” “반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잘못 때문에 주님의 몸에 분열로 얼룩진 상처를 낸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이런 책망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분열이 민족의 분열입니다. 지금 이 민족의 암적인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분열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최대의 복음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생명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4:4~6).

주를 믿고 구원받는 신앙은 하나이나 변증하는 신학은 다양합니다. 주와 연합하는 세례의 의미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양식은 다양합니다. 성령은 하나이나 은사는 다양합니다. 이것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은 예수께서 누워 있는 요람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요람을 조사하는 일보다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기 예수가 누워 있는 말구유가 어떻게 생겼나, 어디에 있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기 예수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동방박사를 인도한 별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별이 인도하는 집에 들어가 아기 예수를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이 그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쓰신 것은 저들의 인물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다 버렸을 것입니다. 가인을 버리고, 이스마엘을 버리고 에서를 버리고, 사울 왕을 버리고 계속해서 버리신 역사가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다 버렸습니다. 성경을 손에 들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꿈틀거리면서 나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임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

 

그러면 성경에서 어떤 예수를 만나야 됩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이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미가서 52절에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날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 714절에 보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합니다. 또 창세기 2218절에 보면 이삭의 씨로 말미암아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리 알아도 나에게 생명이 되신 예수,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않고는 살아 계신 예수를 만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은 동시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병든 사람은 치료하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의 부요를 주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낙심된 자는 용기를 주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실망한 자들은 위로해 주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무덤 가운데 있던 나사로는 살려주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안 되었습니다. 병을 고쳤으나 죽었고, 떡을 얻어먹었으나 또 배고팠고,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으나 결국 죽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를 만나지 않고는 살아 계신 예수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만났으나 저들에게 예수는 살아 계신 예수가 되지 못하고 죽은 예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예수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주의 종들이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강단에서 복받으라고 증거합니다. 예수가 병을 고쳤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증거해도 죽어야 할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복을 받아도 그 복으로 행복을 얻은 자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신학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3년 동안 유대 땅을 거니셨는데 어느 날 가이샤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621절에 보면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16:23)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네가 지금까지 내 뒤를 따르면서 많이 배우고 많은 교훈을 받고 기적을 보았다만은 네가 알아야 할 것을 모른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강의시간에 이런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수의 강의 도중 종아, 너 무슨 공부를 하니?” “예 신학공부이옵니다.” “신학이 무슨 학문이냐?”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학을 누구한테 배우니?” “교수님한테 배웁니다.” “하나님을 나한테 배워야지 왜 교수한테 배우느냐?” “하나님, 하나님을 어떻게 직접 배울 수 있습니까?” 마음으로 조용히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때 누가 너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가르쳤느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배우고 예수의 제자가 되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11:29). 그때 머릿속에 그 멍에가 뭘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그 멍에가 십자가의 멍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신학은 하나님 학문이니까 하나님한테 배워야 한다.’고 믿고 하나님을 배우는 일로 일관했습니다.

한번은 방학이 되어 시골에 갔더니 집안 어른들이 나를 보고 자네가 서울에서 대학 다닌다지?” 합니다. “, 그렇습니다.” “무슨 대학인가?” “신학 대학입니다.” “귀신 신자 대학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신자 대학입니다.” “하나님 자도 있나?” “옥편에는 귀신 자밖에 없는데 하나님 자가 있는가?” “저는 하나님 자 대학을 다니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성경에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모르는 신학은 귀신 신학이니까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하나님의 신학, 하나님의 일은 내가 십자가에 죽는 것인데 네가 그것을 모르는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학을 할것이냐? 귀신 신학을 할 것이냐?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신학에 근거하지 아니하면 그게 다 귀신 신학입니다. 귀신도 병 고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돌덩이를 떡덩이가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귀신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천하만민의 영광도 귀신이 다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고 살리는 일은 귀신이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고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에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찌르고 쪼개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의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2~13).

이 말씀 가운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찌르고, 쪼개고,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히브리서의 모든 내용은 제사문서입니다. 양의 옆구리를 찔러서 피를 쏟게 만듭니다. 쪼갭니다. 그리고 다 드러내어서 하나님 앞에 불살라 제물로 드립니다. 이 사건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이룰 사건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에 여인의 후손 가운데 그리스도가 올 것을 예언한 그대로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모리아 산상에서 아브라함은 어린 양을 찌르고 쪼개고 불살라 제물을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장차 오실 예수를 계시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죽음의 천사가 건너갔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해서 찔림을 당하고 쪼개어지고 자기 전 존재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놓으신 예수, 그 예수를 만나야만 하나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나에게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줄 믿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관에 찔렸습니다. 옆구리를 찔렸습니다. 자기 자신을 쪼개었습니다. 자기 전 존재를 하나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를 보고 예수에게서 찔림과 쪼개짐과 내놓으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보는 예수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만난 사람만이 부활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따랐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믿지 못한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찔림과 쪼개짐과 드러내놓는 하나님의 사건을 본 사람만이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나를 찌르고 쪼개는 말씀

 

오늘 이 사건이 우리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임하기를 원합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바로 성령의 검입니다. 에베소서 617절에 보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라고 말합니다. 이 검은 짐승을 잡는 칼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성령의 검으로 나를 찔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바로 나의 죽임이요, 십자가의 찔림이 나의 찔림이요, 쪼개짐이 나의 쪼개짐이요,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될 때만 나에게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예수를 통해서 확증되었습니다. 수천 년 전에 계시한 그 말씀대로 때가 되어 예수가 태어나고, 십자가의 사건을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장차 재림할 그 사건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자연 만물을 보고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을 알지만 그것을 통해서 살아 있다고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이 말씀이 나에게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베드로가 설교할 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2:36)할 때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베드로에게 성령의 검이 되어 찔러 쪼개었기에 듣는 자들의 마음을 찔러 쪼갤 수 있었고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회개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받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찔림이 나의 찔림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죽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세 가지 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십자가, 예수가 골고다에서 진 십자가, 이제는 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계시되어진 선지서들과 율법으로부터 많은 족장들이 계시한 것이고 그 계시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가 몸을 입고 친히 십자가의 사건을 이루는 것이며 이제 그 사건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내재한 분이기 때문에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수십 년 목회하면서 눈물도 많이 흘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지만 그 사건이 제 자신에게 그렇게 큰 변화를 주지는 못 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교회 전도사로 가서 목회하면서 제게 결정적인 감동을 준 것은 고난주간에 금식을 하고 성전에 가서 십자가를 볼 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서 들려주신 음성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음성이 내 가슴을 울렸습니다.

저는 눈을 뜨고 볼수가 없어서 눈을 감고 !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여, 주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 몸을 버렸다.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버렸느나?” 그 음성을 듣고 정욕도, 욕심도, 교만도 버리지 못한 내 자신을 보면서 통곡하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울게 하셔서 울었습니다. 그 후로는 제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라. 저 사망 권세 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으로는 내 생에 큰 변화가 오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감정은 늘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났지만 내 생의 의지의 변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 종이 담석증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이 되지 않고 몸이 쇠약하여 늘 사경을 헤매던 어느 날, 성전에 가서 기도하던 중에 갈라디아서 220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이 말씀이 성령의 검이 되어 나를 찔렀습니다. 쪼개었습니다. 속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나를 별세시켰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예수의 죽음에서 나의 죽음을 보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요, 예수가 내 안에 살아 계신 분이심을 성령께서 깊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순간 나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죽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 고백을 한 이후에는 내 안에 계신 예수로 세상을 보고 예수의 음성으로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의 심령으로 성경을 보니 옛날 그 성경이 아니었습니다. 입을 열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구체화되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변화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복음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예수 십자가의 죽음이 먼저 자신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사건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면 자기 삶에서 엄청난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행복과 교인들의 행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행복하게 살려고 믿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나 자신에게 복음이 됩니다. 그리고 나의 생활에 행복한 예수를 모시고 살게 되며 교인들을 행복하게 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도 행복한 목회가 됩니다.

저는 장로님들과 함께 당회를 하면서 가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 당회란 말을 쓰지 맙시다. ‘십자가 회의라고 합시다. “왜냐하면 십자가 회의를 하면 십자가에 죽는 결의만 하니까 그때마다 부활하신 예수를 모시게 될 것입니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목사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때 교인도 나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목사는 십자가의 사건을 교인들에게만 요구하면 안 됩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나에게서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목사가 죽으면 교인도 따라서 죽습니다. 목사가 육성으로 살아 있으면 교인들도 육성으로 똑같이 살아서 교회가 소란합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제가 한번은 통합측 장로대회에 갔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강의제목은 복음전파였습니다. 성령께 간구했더니 종아, 저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를 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들이여, 세상에 복음전파를 하기 전에 자신에게 하시오.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인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나에게서 일어나야 나의 복음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복된 소식이 됩니다. 복음을 가진 장로가 당회할 때는 복음이 나올 것이요, 복음이 없는 장로에게서는 소음이 나올 것이요, 소음 내는 장로는 천당 가기 힘들 것이오.”하고 전했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주의 종들이여, 복음을 가지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나를 찌르고, 쪼개고, 드러내야 합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나를 죽이고 예수와 함께 살아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로 살아야 합니다. 이때 목회 현장에서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예리한 검과 같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찌르고 쪼개는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면 교회가 변화되고 지역 사회가 변화되며 민족 사회에 개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이 사회의 개혁은 오직 살아 있는 말씀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교회가 살고 민족과 세계가 살아날 것입니다.

! 성령이여, 우리의 심령 속에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임하여 찌르고, 쪼개고, 드러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