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레위기

[레11:1] 당신의 식생활은 성결하십니까?

'코이네' 2020. 9. 2. 18:22

당신의 식생활은 성결 하십니까? 

(식생활문화)

본문/ 레위기 11:1-23

설교 : 황권철 목사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시다.
   레위기의 주제는 성결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거룩하고 성결해야 합니다. 레위기 1-7장은 5대 제사, 8-9장은 제사장 위임식, 10장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11장은 성민의 식생활 문화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성민의 식생활 문화를 규정해 주신 계시의 목적이 무엇인가?
   식생활 문화는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 시대별로 분류해 보면 ① 천지창조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세기 2:16)라고 하심은 식물만 허용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② 노아 홍수 이후 시대부터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의 손에 붙이었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세기 9:2-3)고 모든 생물을 식물로 허용하였습니다. ③ 모세 율법 시대에 와서는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레위기 11:46-47)고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였습니다. ④ 초대 교회 시대에는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사도행전 10:11-13)고 하심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식생활은 인간 삶의 기초입니다. 사람은 먹는 음식에 따라 입의 구조와 크기가 달라집니다. 입이 형성된 구조에 따라 자연히 발음과 억양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지역마다 기후와 토질이 달라 생산되는 특산물이 다르므로 먹는 식물에 따라 각기 다른 방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언어가 다르고 그 언어가 만든 문화와 생활양식이 다르므로 자연히 생각하는 의식구조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인생들에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성결한 삶을 살게하신 것입니다.
 
첫째: 당신은 회개를 통해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족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3)
   저가 초등 학교 시절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 때입니다. 대부분의 집에 농사용으로 소를 키웁니다. 그 당시에 소는 여름철에는 풀을 베어서 주고, 아침과 오후에는 풀을 먹이려 소을 몰고 산과 들판으로 나갑니다. 온 산과 들판에는 소들이 풀을 떧어 먹습니다. 그 때에 저의 집에서 소먹이는 일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오늘 성경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두 가지 신령한 것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소들이 길을 가다가 간혹 미끄러운 곳을 통과할 때는 몸 자세를 낮추고는 앞발을 세워서 파지(把指)를 합니다. 그래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합니다. 다른 하나는 집으로 돌아와 외양간에 들어간 소는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먹은 풀을 다시 끄집어 올려서 되새김질을 합니다. 그러다가 간혹 비닐 봉지나 나뭇가지나 쇠붙이 같은 것이 있으면 하나씩 걸러 냅니다.
   이것은 실로 인생에게 좋은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복잡한 산업 전선에 나가서 일할 때 한푼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다 집어삼킵니다. 그러다가 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 일을 마치고 자리에 누워서 하루 동안에 행한 일을 하나씩 끄집어 되새김질을 해 보면 도무지 먹어서는 안될 해로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것을 전부 하나씩 걸러 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육체가 건강해집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사는데 회개는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한복음 13:10)라고 했습니다.  
 
둘째: 당신은 청결한 삶을 통해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물에 있는 모든 것 중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무릇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것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라”(9-10)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의 일입니다. 저가 어릴 때에 6. 25를 지난 60년대 시절에 살아가기 참으로 어려운 시절입니다. 그 때에 쌀밥과 고기를 먹는 집이면 부잣집이었습니다. 쌀은 농사를 지어서 얻어야 하지만 고기는 주로 산에서 짐승이나 강에서 고기를 잡아먹기도 합니다. 그때 간혹 소를 들판에 쳐(방목) 놓고 냇가에서 고기를 잡습니다. 그때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고기들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대부분 깨끗한 물에서 헤엄치며 삽니다. 그러나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매기나 꼼장어는 물밑 흙속에 있습니다. 그때 어떤 고기를 잡느냐에 따라서 그날 하루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물밑 흙이나 갯벌속에 있는 것을 잡는 날이면 온 몸에 뻘 투성이가 됩니다.
   고기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의 주 기능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 기능도 있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할 것은 지느러미는 헤엄치는 역할을 하며, 비늘은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합니다. 지느러미를 가진 고기는 탁류와 함께 떠내려가지 않고 물살을 거슬러 청수를 향해 올라갑니다. 성도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얽매여 갯벌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가치관을 뚫고 탁류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님을 모신 삭개오는 더 이상 여리고 갯벌에서 낙을 누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누가복음 19:8)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누가복음 19:9)고 했습니다.

 

셋째: 당신은 온유한 삶을 통해서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13-19)
   새중에서 이러한 것들을 금했습니다. 그 하나는 독수리와 같이 양육강식을 하는 육식하는 새들입니다. 왜냐하면 성민이 사납고 흉폭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았습니다. 다음은 까마귀 같이 본성이 부패하고 썩은 것을 좋아하는 새입니다. 성도는 썩고 부패된 것을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지 그것을 즐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는 올빼미와 같이 야행성 기질이 있는 새들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야행성이란 아름다운 창조 질서를 거스리는 삶을 두고 하는 말이지 오늘날 산업 사회에서 행하는 주야가 교차된 삶과는 다른 말입니다.
   당신은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본래 그렇게 지으시고 가증하다고 하셨는가? 이 모든 자연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것이며 모든 자연은 성결한 백성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위탁받은 관리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으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 16:4)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산상수훈 중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26)고 했습니다. 여기서 공중에 나는 새는 약자를 해하지도 않고, 부정한 속된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창조 질서를 거스려 밤에 행치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먹이신다고 나무에 앉아 있는 새가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이 잘 되어 생명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면서도 부지런히 나는 근면하고 성실한 새입니다.
  
넷째: 당신은 소망중에서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날개가 있고 발로 기어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20-21)
   저가 어릴 때 많이 먹었던 곤충 중에 메뚜기가 있습니다. 가을 추수기가 되면 나락(벼)논에 메뚜기 떼들이 모여들니다. 그때 그것을 잡아서 뽁아 먹기도 하고 양계를 하시는 분들은 사료용으로도 씁니다. 곤충 중에서 금하신 것은 기어 다니는 것입니다. 본래적으로 기어다니는 곤충이 있으나 성민의 삶을 두고 말할 때 기어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창세기 3:14)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배로 기어다니는 것을 가정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곤충들 가운데서는 네다리가 있어서 기어가다가도 뛰고 날개가 있어서 나는 것들을 먹게 했습니다.
   성민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성도는 비록 땅에 살고 있지만 땅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땅에 붙어서 기어다니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땅에서 뛰는 다리를 주었습니다. 이 다리에는 복음의 신을 신고 뛰어야 하며, 날개에는 소망을 실고 하늘을 날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립보서 3:19-20)고 했습니다. 땅에 붙어서 기어 다니는 세속적인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항상 위를 소망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의 삶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계시를 깨닫을 수 있도록 인도하심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환란의 터널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 세대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영적으로는 얼마나 우리의 심성이 메말라 가는지 모릅니다. 환경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지상 최고의 스승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